
레드 아일랜드의 빨간 수저, 9년 간의 제주여민회 활동기
- 제주여민회 양희주 활동가

2016년 제주에서 청년 활동이 움틀 때 만난 그는 서울에서 다시 돌아온 ‘유턴 청년’이었고,) 나는 지역사회를 알아가는 이주 청년이었다. 10년 동안 우리는 각자 치열하게 청년기를 보냈다. 자주 연결되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면서. 내가 여기저기 부유하는 사이, 양희주는 ‘제주여민회 활동가’로 고정핀이 박힌 인물이었다. 늘 거기에 있던. 그런 그가 멀지 않은 시점에 퇴사를 준비하고 있단다. 그의 9년을 남겨놓고 싶었다. 한 청년이 지역의 여성운동단체에서 성장하고 변화한 빛과 그림자를.
- 희주님 이름이요. 뜻이 어떻게 되나요?
제주여민회(이하 여민회) 사무국장 양희주입니다. 2017년부터 시작했으니, 어느덧 9년차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이름이요? 바랄 희, 붉을 주를 써요. 작명소에서 받아 온 거래요. 다른 좋은 뜻이 있겠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빨갛게 되길 바란다, 입니다.
- 레드 아일랜드의 빨간 수저다! 어머니도 여성 운동하셨지요?
오래 하셨지요. 저희 삼남매 어릴 땐 공무원이셔서 밥 사주는 큰언니, 왕언니 같은 존재였나봐요. 저희가 좀 크고 나서는 활동에 나서셨다가, 퇴직하신 후엔 단체 공동대표도 역임하셨어요.
어릴 때 저도 엄마 따라서 제주여성영화제도 가고 3.8 여성대회도 가곤 했어요. 10대 땐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희롱 대응 투쟁 때도 엄마와 함께 도청에 나가 인간띠잇기에도 참여했고요. (2002년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희롱 사건 - http://bit.ly/4FVDnf 제주여민회는 당시 피해자 편에 서서 대응 투쟁 전면에 나섰다.) 영화제 개막식 같은 날엔 사람이 많아야 하잖아요. 친구들도 데리고 오래서 신나서 데려가기라도 하면, 영화가 너무 재미없어서 친구들한테 미안했던 기억들이 있어요. 그렇게 동원됐지만 (동원이라고 써도 됩니까? 됩니다!) 그게 꼭 세뇌라거나 선택권이 박탈됐다는 건 아니에요. 엄마가 페미니즘이나 여성 운동을 설명하거나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삼남매 중 사회 운동하는 것도 저밖에 없고요.
- 그래도 영향을 받았을 텐데요?
영향이 없지 않죠. 하지만 제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여성학을 접하게 된 건 20살 때 성공회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예요. 저에게 모성 이데올로기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같은 질문과 고민이 삶에 너무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여성학이라는 게 저에게 ‘확’ 주제가 됐어요. 학교 다닐 땐 페미니즘 리부트 전이라 여성학 신간도 별로 없을 정도였고, 학내 소모임도 없었기에 새로 만들어 활동했어요. 제 삶에 여성 키워드가 생기고, 활동도 하면서 제가 단단해진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엄마가 우리가 어릴 때 일일이 교육하지 않으셨던 게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해요.
키워드가 엄마와 같아진 이후에는 도움 받는 일들이 생겼어요. 그런데 저는 무급 인턴 한 번 경험하고 나서, 난 시민단체에 가지 말아야겠다 싶기도 했죠.
- 왜요?
아니 글쎄, 2개월 인턴하는 대학생인데 뭘 하든 사람들한테 다 부탁해야 하는 거예요! 가령 행사 100명 채워야 해, 그럼 친구들한테 이거 좀 시간 내줘라, 부탁하는 거죠. 그게 기본값인 것 같아서 시민단체는 아니다 싶은데 막상 일반 사기업은 안 내키고. 그래서 사회적경제 중간 지원 조직에 들어갔습니다. 취직 후 2년 반 동안 조직이 10명에서 3명으로 쪼그라들었는데 일은 그대로였어요. 그래도 배우는 게 많으니까 이 악물고 일했어요. 압축적으로 일하며 성장했지만 문득 서울에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이 어쨌든 사람이 살기에 좋지는 않잖아요.
- 그래서 제주에 돌아왔어요? 제주가 먼저였나요, 여민회가 먼저였나요?
제주에 돌아가고 싶다! 가 먼저. 사실 청소년기에 몇몇 친구들과의 관계가 단단히 꼬여서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이 내내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육지에서 성공을 바란다기보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욕구가 무척 컸어요. 그러다 정말 벗어나 봤잖아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도 생기고 신나게 공부하고, 소모임 활동도 하고, 취직도 하면서 제가 단단해졌잖아요. 그러니까 돌아올 수 있겠더라고요.
사회적경제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다보니 다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제가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때 마침 제주 단기 프로젝트 반상근으로 6개월 정도 일을 했고요. 그 다음해 바로 제주여민회에 입사했어요.
그렇게 돌아와서 지금까지, 세 가지 키워드로 저를 소개할 때 ‘제주, 청년, 여성’이라고 밝혀요. 섬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지역인 제주에서 나고 자랐고, 청년 활동가, 여성 운동가니까. 서울에 다녀온, 그러니까 ‘환기’한 경험이 더 나다운 삶을 찾는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양희주는 지역, 청년, 여성을 키워드로 한 책을 공저로 준비하고 있다.)
- 그렇게 입사하고 9년이 흘렀네요. 오해도 많았고, 탈도 많았죠?
입사 후 제 마음은 난 끝까지, 무조건 열심히, 잘해야 한다! 였어요. 시기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입사한 시기엔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고 어디서든 꿈틀꿈틀하는 게 막 느껴졌잖아요. 젊은 페미니스트들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저도 올인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제가 사무국장이 됐을 땐 저를 둘러싼 오해도 많았어요. 지역사회에서 시민단체의 전 대표 딸이 사무국장이 된 것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가 돌았을 때는 그냥 제가 활동으로 증명하려고 했어요. 전임자 선배로 인해 차기 사무 책임자를 논의할 때, 조직적으로 가장 좋은 수에 대한 검토가 있었고 결국 어머니가 대표직을 내려놓게 됐어요. 그때 어머니도 저도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같이 많이 울었어요. 어머니는 대표직을 포기하신 거고. 저도 첫 월급 150만원 받았던 박봉에, 책임은 책임대로 져야 하는데 어머니를 밀어낸 것 같은 그림이 당황스럽고요. 하지만 조직에서 어쨌든 젊은 사람 만들어야 된다, 젊은 중간 리더십 만들어야 된다는 조직의 결정은 여전히 존중하고,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너무 갈렸지만요!)

양희주는 제주생명평화대행진에서 해마다 안전팀을 맡고 있다.
- 사무국장만 6년차네요. 아끼는 사업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이에요. 입사한 17년에 제주 여성들의 문제를 발굴하는 원탁회의를 했고, 18년에 마을 내 여성대표성과 관련한 실태조사를 하고, 19년에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을 국내 최초로 시작했어요. 그 실무를 모두 맡았었죠. 당시 정은숙 선배님(현 제주여민회 대표이자 제주시민사회연대회의 공동대표), 김이승현 선배님과 함께요. 문제점들을 경청해서, 결국 무에서 유를 만든 과정을 함께 했잖아요. 그래서 애정이 굉장히 커요. 성평등 마을 규약이라는 아이디어가 도내외에서 좋은 정책으로 평가 받고,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하고 있어서 더 뿌듯하고요. 우리 단체의 반전에도 한몫했죠. 우리단체를 제주시내에서 활동하는 ‘가방 끈 여자들’, 그렇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마을에 들어가 첫 프로그램 할 때 서로 어색하다가 프로그램 끝냈을 때 참여하신 마을여성들이 감정적으로 해방이 된 표정을 보면,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 달라진 온도. 그렇게 시작해야 다음 사업들이 다 순리대로 가는 것도 이제 알고요.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은 아, 정말 몸으로 부딪혔던 애정하는 사업이다!!
- 또 그 사이 두 번의 광장이 열렸었죠. 양희주는 광장에서 어떻게 성장했나요?
2016년에는 제주로 이주한 해이기도 하고 제주여민회 상근활동가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광장의 실무에 적극 결합하지 못했고, 시민으로서만 광장에 나갔죠. 그래서 결합도 자체에 차이가 있었죠. 이번엔 민주노총 제주본부, 강정친구들, 제주퀴어프라이드 조직위원회와 가장 긴밀하게 함께했어요. 우리단체 사무국 활동가는 계속 총출동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목소리 높였었죠. 3.8제주지역 여성대회는 광장을 넓히는 개념으로 집담회를 기획해서 진행했는데, 이 또한 뿌듯한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집담회 실무 총괄의 역할을 맡았거든요. 선언문 초안도 작성하고요. 시민이었다가, 이제는 한 파트를 총괄하는 사람이 된거죠.

민주노총 제주본부 김경희 사무처장과 함께 행진 사회를 함께 보고 있다.
광장의 분위기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번에 열린 광장은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집회 때마다 평등약속문을 읽고, 평등한 집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상도 상영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남태령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양한 의제들을 두고 함께 연대하는 느낌이 물씬 풍겨졌기 때문인데요. 저는 여성 운동이 여성 운동만 잘한다고 해서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여성 노동 여성 성소수자 환경 이런 것들이 다 사실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각자 전문 분야가 있어야 하겠지만 연대할 수 있는 뭔가 단단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만 했는데, 그걸 눈으로 본 광장이었죠.
- 많이 성장한 만큼 일이 많았을 텐데 숨구멍은 있었나요?
저는 취미도 없었고 술자리를 좋아했어요. 술이 아니었으면 더 맹목적으로 일만 했을텐데, 사실 저는 그냥 제가 풀어지는 것도 좋거든요. 또 양희주라는 사람으로서 있을 때는 저는 엄청 밝고 쾌활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그걸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술자리예요. 그런 것도 저한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보여주려면.
몇 년 전부터는 야구에 관심이 커졌는데 거의 유일한 취미예요. 근데 그게 또 활동이랑 연결이 되더라고요. 투수가 실수해서 거의 홈런 맞았는데 기가 막히게 수비가 잡았어. 그럼 선수들끼리 고맙다고 인사하고 치얼업! 항상 홈런 치고 들어왔을 때도 치얼업! 파이팅, 잘 한다! 이런 모습들이 너무 좋은 거예요. 나는 활동판 안에서 그런 사람이었나, 그런 판이 있었나? 내가 열심히 하고, 잘한 것을 남이 알아줘서 얘기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많이 성찰됐죠.
- 그만두고 나서의 향후 계획은 좀 어때요?
그만두고 나면 일단은 한 2, 3개월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어요. 대학 졸업한 직후부터 바로 일을 시작했고 지금껏 쉬어본 일이 없어요. 좀 쉬다가, 내년엔 지방선거도 있으니까 제주여민회 정책위원회에서 선거 대응하면서 재미있게 지내보고 싶어요. 활동을 백업하는 활동 회원이 되는 거죠. 우리단체를 항상 활동할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지금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 중인데, 활동가들이 직접 연구도 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시작했지만 학위를 따더라도 활동가 정체성이 더 클 것 같아요. 연구자라고 불릴 수 없더라도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할 거다, 그런 마음은 먹고 있습니다.
- 책 홍보해주세요.
부산, 제주, 광주에서 1명씩의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왜 그 지역에서 계속 살고 있는지- 또 페미니즘, 지역 정치, 지역 역사, 나 이런 키워드에 대한 생각을 연결해 글을 쓰고 있어요. 지역, 청년, 여성이 가제예요. 약 2년 반 동안 함께 온라인으로 만나 책도 읽고, 논문도 읽으면서 준비해왔어요. 이제는 정말로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에요.
-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일 줄이기를 못 했어요. 상근 활동가들은 한정적인데 일이 많았죠. 그래서 앞으론 일이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만두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거예요. 내가 없어지면 일이 좀 줄지 않을까? (웃음) 제가 일 욕심이 많았거든요.
- 함께한 동료들 중에 고마운 사람은?
제가 사무국장 시작할 때 제주여성영화제를 맡아주기 시작해서, 올해 퇴사한 이세원 전 문화팀장이 가장 고마워요. 저랑 대학교 친구예요. 제주여성영화제로 같이 일해보자고 삼고초려해서 같이 일을 시작했어요. 이세원이 제주여성영화제 상근활동을 확정하고 제주로 이주한 뒤 3년 간 같이 살고, 같이 일하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술친구이기도 했죠. 저는 제주여성영화제 실무를 잘 몰라요. 이세원이라는 동료에게 온전히 맡겼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우리 정말 잘, 같이, 무사히 버텼어요.

사진이요? 제가 좋아하는 영상이 있는데 그걸 캡처해서 드릴게요. 2023년 제주여성영화제 폐막식하고, 뒤풀이를 한 뒤에 한 차 더 가려고 이동하는 중에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영상이 있어요. 뒤에서 남편이 찍어줬거든요. (남편이 아니고 친구 손을 잡았군요. 네 ㅋㅋ)
- 현재의 고민과, 향후 계획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광장에서의 목소리들이 어떻게 계속 들리게끔 할 것인가... 광장의 목소리와 요구들이 정권교체만으로 수렴되지 않았으면 해요. 그렇다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이런 과제들이 남아있겠습니다. 한국에 사는, 제주에 사는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계속해서 연대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상근 활동가로서의 삶은 곧 마무리되겠지만, 시민 활동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 9년 동안 당신을 견인했던 문장은? 직접 써줘요.
쓸모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나랑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든든해, 걱정 없어, 이런 인정이 저에게 항상 힘이 됐어요. 그게 저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방송, 집회, 언론 기고... 그런 보이는 일은 몇 개 안 되고 눈에 안 보이는 90%의 실무가 있죠. 그런 것들이 저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내가 9년 동안 잘 해내왔다. (웃음)
인터뷰어 : 은영
그냥 활동가. 인드라망 속, 반짝이는 사람들의 빛을 감상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적대감보다 사랑을 동력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면서 산다. 그 수행으로 북을 치고 춤을 춘다. 서귀포에서 청년 전환 학습 공동체 ‘신술목학교’, 여성 바투카다 그룹 ‘블로꾸 자파리’ 운영 중.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레드 아일랜드의 빨간 수저, 9년 간의 제주여민회 활동기
- 제주여민회 양희주 활동가
2016년 제주에서 청년 활동이 움틀 때 만난 그는 서울에서 다시 돌아온 ‘유턴 청년’이었고,) 나는 지역사회를 알아가는 이주 청년이었다. 10년 동안 우리는 각자 치열하게 청년기를 보냈다. 자주 연결되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면서. 내가 여기저기 부유하는 사이, 양희주는 ‘제주여민회 활동가’로 고정핀이 박힌 인물이었다. 늘 거기에 있던. 그런 그가 멀지 않은 시점에 퇴사를 준비하고 있단다. 그의 9년을 남겨놓고 싶었다. 한 청년이 지역의 여성운동단체에서 성장하고 변화한 빛과 그림자를.
- 희주님 이름이요. 뜻이 어떻게 되나요?
제주여민회(이하 여민회) 사무국장 양희주입니다. 2017년부터 시작했으니, 어느덧 9년차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이름이요? 바랄 희, 붉을 주를 써요. 작명소에서 받아 온 거래요. 다른 좋은 뜻이 있겠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빨갛게 되길 바란다, 입니다.
- 레드 아일랜드의 빨간 수저다! 어머니도 여성 운동하셨지요?
오래 하셨지요. 저희 삼남매 어릴 땐 공무원이셔서 밥 사주는 큰언니, 왕언니 같은 존재였나봐요. 저희가 좀 크고 나서는 활동에 나서셨다가, 퇴직하신 후엔 단체 공동대표도 역임하셨어요.
어릴 때 저도 엄마 따라서 제주여성영화제도 가고 3.8 여성대회도 가곤 했어요. 10대 땐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희롱 대응 투쟁 때도 엄마와 함께 도청에 나가 인간띠잇기에도 참여했고요. (2002년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희롱 사건 - http://bit.ly/4FVDnf 제주여민회는 당시 피해자 편에 서서 대응 투쟁 전면에 나섰다.) 영화제 개막식 같은 날엔 사람이 많아야 하잖아요. 친구들도 데리고 오래서 신나서 데려가기라도 하면, 영화가 너무 재미없어서 친구들한테 미안했던 기억들이 있어요. 그렇게 동원됐지만 (동원이라고 써도 됩니까? 됩니다!) 그게 꼭 세뇌라거나 선택권이 박탈됐다는 건 아니에요. 엄마가 페미니즘이나 여성 운동을 설명하거나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삼남매 중 사회 운동하는 것도 저밖에 없고요.
- 그래도 영향을 받았을 텐데요?
영향이 없지 않죠. 하지만 제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여성학을 접하게 된 건 20살 때 성공회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예요. 저에게 모성 이데올로기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같은 질문과 고민이 삶에 너무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여성학이라는 게 저에게 ‘확’ 주제가 됐어요. 학교 다닐 땐 페미니즘 리부트 전이라 여성학 신간도 별로 없을 정도였고, 학내 소모임도 없었기에 새로 만들어 활동했어요. 제 삶에 여성 키워드가 생기고, 활동도 하면서 제가 단단해진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엄마가 우리가 어릴 때 일일이 교육하지 않으셨던 게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해요.
키워드가 엄마와 같아진 이후에는 도움 받는 일들이 생겼어요. 그런데 저는 무급 인턴 한 번 경험하고 나서, 난 시민단체에 가지 말아야겠다 싶기도 했죠.
- 왜요?
아니 글쎄, 2개월 인턴하는 대학생인데 뭘 하든 사람들한테 다 부탁해야 하는 거예요! 가령 행사 100명 채워야 해, 그럼 친구들한테 이거 좀 시간 내줘라, 부탁하는 거죠. 그게 기본값인 것 같아서 시민단체는 아니다 싶은데 막상 일반 사기업은 안 내키고. 그래서 사회적경제 중간 지원 조직에 들어갔습니다. 취직 후 2년 반 동안 조직이 10명에서 3명으로 쪼그라들었는데 일은 그대로였어요. 그래도 배우는 게 많으니까 이 악물고 일했어요. 압축적으로 일하며 성장했지만 문득 서울에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이 어쨌든 사람이 살기에 좋지는 않잖아요.
- 그래서 제주에 돌아왔어요? 제주가 먼저였나요, 여민회가 먼저였나요?
제주에 돌아가고 싶다! 가 먼저. 사실 청소년기에 몇몇 친구들과의 관계가 단단히 꼬여서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이 내내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육지에서 성공을 바란다기보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욕구가 무척 컸어요. 그러다 정말 벗어나 봤잖아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도 생기고 신나게 공부하고, 소모임 활동도 하고, 취직도 하면서 제가 단단해졌잖아요. 그러니까 돌아올 수 있겠더라고요.
사회적경제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다보니 다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제가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때 마침 제주 단기 프로젝트 반상근으로 6개월 정도 일을 했고요. 그 다음해 바로 제주여민회에 입사했어요.
그렇게 돌아와서 지금까지, 세 가지 키워드로 저를 소개할 때 ‘제주, 청년, 여성’이라고 밝혀요. 섬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지역인 제주에서 나고 자랐고, 청년 활동가, 여성 운동가니까. 서울에 다녀온, 그러니까 ‘환기’한 경험이 더 나다운 삶을 찾는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양희주는 지역, 청년, 여성을 키워드로 한 책을 공저로 준비하고 있다.)
- 그렇게 입사하고 9년이 흘렀네요. 오해도 많았고, 탈도 많았죠?
입사 후 제 마음은 난 끝까지, 무조건 열심히, 잘해야 한다! 였어요. 시기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입사한 시기엔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고 어디서든 꿈틀꿈틀하는 게 막 느껴졌잖아요. 젊은 페미니스트들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저도 올인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제가 사무국장이 됐을 땐 저를 둘러싼 오해도 많았어요. 지역사회에서 시민단체의 전 대표 딸이 사무국장이 된 것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가 돌았을 때는 그냥 제가 활동으로 증명하려고 했어요. 전임자 선배로 인해 차기 사무 책임자를 논의할 때, 조직적으로 가장 좋은 수에 대한 검토가 있었고 결국 어머니가 대표직을 내려놓게 됐어요. 그때 어머니도 저도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같이 많이 울었어요. 어머니는 대표직을 포기하신 거고. 저도 첫 월급 150만원 받았던 박봉에, 책임은 책임대로 져야 하는데 어머니를 밀어낸 것 같은 그림이 당황스럽고요. 하지만 조직에서 어쨌든 젊은 사람 만들어야 된다, 젊은 중간 리더십 만들어야 된다는 조직의 결정은 여전히 존중하고,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너무 갈렸지만요!)
양희주는 제주생명평화대행진에서 해마다 안전팀을 맡고 있다.
- 사무국장만 6년차네요. 아끼는 사업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이에요. 입사한 17년에 제주 여성들의 문제를 발굴하는 원탁회의를 했고, 18년에 마을 내 여성대표성과 관련한 실태조사를 하고, 19년에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을 국내 최초로 시작했어요. 그 실무를 모두 맡았었죠. 당시 정은숙 선배님(현 제주여민회 대표이자 제주시민사회연대회의 공동대표), 김이승현 선배님과 함께요. 문제점들을 경청해서, 결국 무에서 유를 만든 과정을 함께 했잖아요. 그래서 애정이 굉장히 커요. 성평등 마을 규약이라는 아이디어가 도내외에서 좋은 정책으로 평가 받고,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하고 있어서 더 뿌듯하고요. 우리 단체의 반전에도 한몫했죠. 우리단체를 제주시내에서 활동하는 ‘가방 끈 여자들’, 그렇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마을에 들어가 첫 프로그램 할 때 서로 어색하다가 프로그램 끝냈을 때 참여하신 마을여성들이 감정적으로 해방이 된 표정을 보면,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 달라진 온도. 그렇게 시작해야 다음 사업들이 다 순리대로 가는 것도 이제 알고요.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은 아, 정말 몸으로 부딪혔던 애정하는 사업이다!!
- 또 그 사이 두 번의 광장이 열렸었죠. 양희주는 광장에서 어떻게 성장했나요?
2016년에는 제주로 이주한 해이기도 하고 제주여민회 상근활동가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광장의 실무에 적극 결합하지 못했고, 시민으로서만 광장에 나갔죠. 그래서 결합도 자체에 차이가 있었죠. 이번엔 민주노총 제주본부, 강정친구들, 제주퀴어프라이드 조직위원회와 가장 긴밀하게 함께했어요. 우리단체 사무국 활동가는 계속 총출동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목소리 높였었죠. 3.8제주지역 여성대회는 광장을 넓히는 개념으로 집담회를 기획해서 진행했는데, 이 또한 뿌듯한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집담회 실무 총괄의 역할을 맡았거든요. 선언문 초안도 작성하고요. 시민이었다가, 이제는 한 파트를 총괄하는 사람이 된거죠.
민주노총 제주본부 김경희 사무처장과 함께 행진 사회를 함께 보고 있다.
광장의 분위기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번에 열린 광장은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집회 때마다 평등약속문을 읽고, 평등한 집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상도 상영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남태령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양한 의제들을 두고 함께 연대하는 느낌이 물씬 풍겨졌기 때문인데요. 저는 여성 운동이 여성 운동만 잘한다고 해서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여성 노동 여성 성소수자 환경 이런 것들이 다 사실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각자 전문 분야가 있어야 하겠지만 연대할 수 있는 뭔가 단단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만 했는데, 그걸 눈으로 본 광장이었죠.
- 많이 성장한 만큼 일이 많았을 텐데 숨구멍은 있었나요?
저는 취미도 없었고 술자리를 좋아했어요. 술이 아니었으면 더 맹목적으로 일만 했을텐데, 사실 저는 그냥 제가 풀어지는 것도 좋거든요. 또 양희주라는 사람으로서 있을 때는 저는 엄청 밝고 쾌활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그걸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술자리예요. 그런 것도 저한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보여주려면.
몇 년 전부터는 야구에 관심이 커졌는데 거의 유일한 취미예요. 근데 그게 또 활동이랑 연결이 되더라고요. 투수가 실수해서 거의 홈런 맞았는데 기가 막히게 수비가 잡았어. 그럼 선수들끼리 고맙다고 인사하고 치얼업! 항상 홈런 치고 들어왔을 때도 치얼업! 파이팅, 잘 한다! 이런 모습들이 너무 좋은 거예요. 나는 활동판 안에서 그런 사람이었나, 그런 판이 있었나? 내가 열심히 하고, 잘한 것을 남이 알아줘서 얘기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많이 성찰됐죠.
- 그만두고 나서의 향후 계획은 좀 어때요?
그만두고 나면 일단은 한 2, 3개월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어요. 대학 졸업한 직후부터 바로 일을 시작했고 지금껏 쉬어본 일이 없어요. 좀 쉬다가, 내년엔 지방선거도 있으니까 제주여민회 정책위원회에서 선거 대응하면서 재미있게 지내보고 싶어요. 활동을 백업하는 활동 회원이 되는 거죠. 우리단체를 항상 활동할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지금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 중인데, 활동가들이 직접 연구도 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시작했지만 학위를 따더라도 활동가 정체성이 더 클 것 같아요. 연구자라고 불릴 수 없더라도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할 거다, 그런 마음은 먹고 있습니다.
- 책 홍보해주세요.
부산, 제주, 광주에서 1명씩의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왜 그 지역에서 계속 살고 있는지- 또 페미니즘, 지역 정치, 지역 역사, 나 이런 키워드에 대한 생각을 연결해 글을 쓰고 있어요. 지역, 청년, 여성이 가제예요. 약 2년 반 동안 함께 온라인으로 만나 책도 읽고, 논문도 읽으면서 준비해왔어요. 이제는 정말로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에요.
-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일 줄이기를 못 했어요. 상근 활동가들은 한정적인데 일이 많았죠. 그래서 앞으론 일이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만두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거예요. 내가 없어지면 일이 좀 줄지 않을까? (웃음) 제가 일 욕심이 많았거든요.
- 함께한 동료들 중에 고마운 사람은?
제가 사무국장 시작할 때 제주여성영화제를 맡아주기 시작해서, 올해 퇴사한 이세원 전 문화팀장이 가장 고마워요. 저랑 대학교 친구예요. 제주여성영화제로 같이 일해보자고 삼고초려해서 같이 일을 시작했어요. 이세원이 제주여성영화제 상근활동을 확정하고 제주로 이주한 뒤 3년 간 같이 살고, 같이 일하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술친구이기도 했죠. 저는 제주여성영화제 실무를 잘 몰라요. 이세원이라는 동료에게 온전히 맡겼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우리 정말 잘, 같이, 무사히 버텼어요.
사진이요? 제가 좋아하는 영상이 있는데 그걸 캡처해서 드릴게요. 2023년 제주여성영화제 폐막식하고, 뒤풀이를 한 뒤에 한 차 더 가려고 이동하는 중에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영상이 있어요. 뒤에서 남편이 찍어줬거든요. (남편이 아니고 친구 손을 잡았군요. 네 ㅋㅋ)
- 현재의 고민과, 향후 계획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광장에서의 목소리들이 어떻게 계속 들리게끔 할 것인가... 광장의 목소리와 요구들이 정권교체만으로 수렴되지 않았으면 해요. 그렇다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이런 과제들이 남아있겠습니다. 한국에 사는, 제주에 사는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계속해서 연대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상근 활동가로서의 삶은 곧 마무리되겠지만, 시민 활동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 9년 동안 당신을 견인했던 문장은? 직접 써줘요.
쓸모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나랑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든든해, 걱정 없어, 이런 인정이 저에게 항상 힘이 됐어요. 그게 저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방송, 집회, 언론 기고... 그런 보이는 일은 몇 개 안 되고 눈에 안 보이는 90%의 실무가 있죠. 그런 것들이 저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내가 9년 동안 잘 해내왔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