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상 기록을 데이타베이스화 하는 게 저의 '꿈'입니다.
- 이음나눔유니온 박주동 활동가

2024년 6월 8일 33회 민족민주열사추모제 서명식 열사 영정들고 행진하는 모습 ⓒ 박주동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박주동(60)은 1991년에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 입사해 2016년에 퇴사했다. 정년을 십년이나 남긴 51세에 퇴사를 결심했을 때, 그를 아는 수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한다. 그는 왜 잘 다니던 안정적인 직장에서 서둘러 퇴직을 했을까?
”월급 제대로 받고, 고용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25년 동안 편하게 살았잖아요. 물론 노동조합 활동도 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요. 저와 같이 노조 활동 했던 사람들 중에 아파서 죽은 사람도 있고,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고, 활동에 온몸을 던지며 직장을 떠난 사람도 있었죠. 항상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만둔 거예요.“
1991년도에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 입사한 박주동은 입사 2년 만에 노동조합 위원장이 되어 10년 동안 일했다. 당시에는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생기기 전이라 회사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 소속된 사업장이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전인 1993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법외 단체가 있었다. 한국관세무역개발원 노동조합은 전노협이 출범하자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전노협에 가입했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면서 가장 성과가 컸던 것은 기능직으로 입사한 여성 직원들을 일반직으로 전환한 것이었어요. 여성 직원은 기능 4종으로 입사하면 퇴직할 때도 기능 4종으로 퇴직하거든요. 남성 직원들이 처음 입사 시 부여받던 일반직 6급보다 급여가 적었어요. 당시에는 우리 사업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남녀 차별이 심했어요. 제가 노조위원장을 두 번째로 할 때 요구했던 게 “직장내 성차별을 없애라“는 거였어요. 3년 정도 싸웠어요. 결국 사측과 교섭을 잘해서 기능직을 다 폐지했어요. 여성 직원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노조위원장으로 10년, 그 앞에 놓인 보람과 성과

2024년 5월. 민주노총 영상학교 노동자 영상패 역할과 과제 강의하는 박주동 ⓒ 박주동
박주동은 2007년 12월 13일 오후 2시에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외딴 산기슭에 읍장, 이장, 마을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관세무역개발원 노동조합 수련원 개원식을 한다. 수련원은 강의실, 관리동, 가족동, 식당 등 4개 동의 건물을 갖추고, 직원들의 휴양 및 워크샵 장소는 물론,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한다. 도·농간 상생의 장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으로 연간 이용객 1만명을 목표로 했다. 수련원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파업이다 투쟁이다 하면서 노조가 조합원들을 끊임없이 동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해주는 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질렀습니다. 조합원들의 휴양복지 차원에서 추진했죠. 저지르지 않고는 못합니다.“
매년 1천 5백 명이 가은 수련원을 이용했다. 그 중 1천 명이 관세노조 조합원 및 가족들이었다. 또한 수련원은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교육을 할 때나 수련회를 위해 무료로 시설을 제공했다. 일종의 연대사업인 셈이다.
10년 동안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고 뒤돌아보니 의외로 성과와 보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건 아니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없으니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은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본인의 선택을 믿었다.
퇴직할 때 박주동의 나이는 51세였다. 일반적인 퇴직 나이보다 10년이나 일찍 퇴직했으니 또 다른 ’시작’이었다. 퇴직 후, 이런저런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2018년에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 서울 본부장 선거에 당선되어 1년 동안 활동했다. 2021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는 경기북부노동인권센터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2022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는 서대문노동자종합지원센터의 센터장을 맡아 일했다.
서울시는 2019년부터 '노동존중특별시 서울'을 표방하며, 서울 시내 모든 자치구에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과 복지 증진을 도모한 바 있다. 특히,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 보호 및 복지 증진에 집중키 위해 노동상담, 법률지원, 노동교육, 문화강좌 등을 제공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공약이었다.
“서울시 각 구에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만드는 일은 좋은 취지의 사업이었지만 말이 많았어요. 왜 세금으로 노동자 사업을 하느냐에서 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사업이라는 말까지 나왔었죠. 이를 추진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은 징계를 먹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동자종합지원센터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센터는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자처하면서 지역연대를 활성화시켰어요. 시민과 노동, 노동과 시민이 함께 하는 거점의 역할을 기꺼이 해냈거든요.
‘서대문마을네트워크’의 활동가분들을 만나고 열심히 교류했어요. 그분들은 열정은 있지만 조직화해서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없었고 저희는 노동조합을 경험했던 사람이니까 함께 활동하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표적인 사업이 &전태일의 풀빵 나눔&이었어요. 마을에서 축제를 할 때나 지역에서 투쟁하는 사업장에 풀빵을 구워서 나눠드렸어요. 2024년에 13번인가 했어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했어요. 주민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보람도 컸고.”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지역의 ‘ㅇㅇ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도 ㅇㅇ행사를 하니 참여하라는 문자가 온다. 가끔은 지역의 작은 영화관을 빌려 공동체 상영도 한다. 그럴때 재빨리 신청해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작년 12월에 계엄이 터지고 탄핵 집회를 할 때, 서대문마을넷 주민들과 함께 풀빵을 구워서 나눠주는 행사를 했어요. 엄청나게 긴 줄이 서 있었어요. 풀빵 굽기는 힘들었지만 풀빵을 구우면서 마을주민과 센터 활동가들의 간격이 많이 좁혀졌어요. 친밀감도 높아지고 정도 들었고요. 우리가 ‘으쌰으쌰‘ 하면 뭘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연대 활동이 왕성해 지니까 센터가 자연스럽게 지역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어요. 저는 ”언제든지 오셔서 쓰시라“고 했고요. 공간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어요. 목적의식을 앞세우면 거리감이 생겨요. 2년 동안 서대문노동자종합지원센터장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사람냄새 나는 조직을 만들었다는 거였어요. 일 할 맛이 났죠.”
비록 3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지만 그가 원했던 목표는 이루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남동리 이장'으로 불린 박주동
박주동은 안동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왔다. 어린시절의 그는 ‘반공소년‘이었다.
“안동댐 준공식을 할 때 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고 학교에서 청소를 시켰어요. 어린 마음에 대통령 할아버지가 온다고 하니까 청소를 열심히 했죠. 종이로 꽃도 만들고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휙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실망이 컸어요.그때부터 박정희를 싫어했어요(웃음).
남들이 보기에 모난 성격은 아니에요. 제 성격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저는 &거절&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직장생활 하고 노조생활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너무 예민하고 까칠하면 주변 사람이 피곤해한다는 걸 알았어요. 어떤 일을 해도 내가 마음이 편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편한 법이거든요. 항상 긴장되어 있고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스트레스 받고 긴장하거든요. 그래서 운동을 하든, 활동을 하든 즐겁게 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박주동의 온화한 품성은 9년간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공공운수노조 남동지구협의회 의장을 겸직할때도 잘 드러났다. ’투쟁은 즐겁게, 서로를 보살피고 챙기자‘는 마음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에 박주동은 ’남동리 이장’이라고 불리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한 손에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남자

이음나눔유니온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박주동 ⓒ 문세경
내가 처음 박주동을 보고 느낀 점은 왜소한 체격에 아무런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잘 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난 모습도 아니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남들은 행사가 있으면 참여자로 오지만 박주동은 늘 준비하는 사람, 치우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거기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말이다.
“1996년에 노동법 개정 투쟁할 때, 관세무역개발원노조 조합원들도 파업에 참여했어요. 그때 비디오 카메라가 하나 생겼어요. 비디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이었어요. 금속노조, 기아차노조, 현대차 노조에서도 행사나 집회때 카메라를 들고 찍더라고요. 각 노조의 영상 담당자들이 기록을 남기자고 영상패를 만들자고 했어요. 그때부터 저도 영상과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요즘은 영상작업을 디지털로 하지만 옛날에는 다 아날로그로 했어요. 노동자 뉴스제작단과 협업하고 서로 알려주면서 편집 기술 배우고, 노동자 미디어 활동단도 만들었어요. 2000년도에 대우자동차가 1,350명 해고 시킬 때, 부평 대우자동차 앞에서 경찰들한테 끌려 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대우자동차 영상패가 울면서 찍었어요. 그게 ‘기록‘이거든요.”
나는 집회나 행사에 가면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고 ’귀찮을텐데 한번도 빠트리지 않고 들고 다니네’라고 생각했다. 박주동은 ‘기록’에 대한 의무감이 컸다. ‘기록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 사라진 것은 되살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박주동에게 카메라를 들게 했다.
“1996년도 부터 찍은 비디오 테이프가 약 5천개가 있어요. 테잎으로 쵤영한 영상이 디지털화되고 메모리카드로 저장한 파일이 약 100테라정도 있고요. 기록된 영상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1만시간은 족히 넘겠네요(웃음).
이것을 정리하는 게 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에요. 또다른 버킷리스트는 마석모란공원 열사 묘역의 사계절을 찍는 거예요. 몇 년 전부터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했어요. 이게 보통작업이 아니거든요. 사계절을 찍으려면 1년 내내 다큐멘터리로 찍어야 하잖아요. 작년에 우연히 ‘열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어요. 처음엔 소소하게 몇 명만 모여서 만들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민주노총 영상패와 이름만 대면 알수 있는 민중가수들과 개인, 모란공원 지킴이 등 약 70여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어요. 그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이 최근에 한 일 중에 가장 보람되고 기뻤어요.”
기록하는 방법에는 글로 쓰고 활자화 하는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영상도 기록의 한 분야라는 걸 간과했다.

2023년 10월 24일 서대문노동자센터노동인권문화제시 참석자에게 인사말 하고 있는 박주동 ⓒ 박주동
박주동이 현재 가장 비중을 두는 곳은 ‘이음나눔유니온‘이다. 박주동은 ’이음나눔유니온‘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다. ’이음나눔유니온’은 퇴직을 하거나 퇴직을 앞둔 사람이 남은 삶을 외롭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 조직이다. 한국은 이미 고령화사회로 접어든지 오래다. 소득이 끊기고 관계가 단절되고 1인 가구(2024년 4월, 1인 가구 비율 41.8%. 행안부)로 산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을 하면 모든 게 단절돼요. 직장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때부터 혼자가 되는 거예요. 혼자되면 고립감이 커져요. 고립감이 들면 사람들 만나기가 싫죠. 직장생활 할 때는 사람들을 만나도 즐겁고 할 이야기도 있고 공통 관심사도 있는데 퇴직을 하면 사람을 만나도 할 얘기가 없어요. 그러다가 점점 고립되고 단절되죠. 그걸 막아야해요. ‘이음나눔유니온’의 조합원 90% 이상이 베이비부머 세대에요.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군부독재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고 민주화 시대까지 겪은 사람들이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겪은 소중한 분들을 방치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자신들이 경험하고 배운 것을 후배들한테 들려주고 좋은 것은 물려주면서 인생 2막을 지원하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음나눔유니온을 만든거예요.”
유럽에는 이미 퇴직자 노조가 있고 규모도 크다. 퇴직자 노조에 속해 사회 곳곳에서 자기 몫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 뼈빠지게 고생하며 산 것을 보상 받는 길은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고령사회를 대비하고 지원하는 조직이 있기는 하다. ‘대한노인회‘라고.
나는 ’대한노인회’에 나의 소중한 인생 2막을 맡기고 싶지 않다. 식민지 시대도 아닌데 태극기를 흔들며 나의 요구를 외치는 건 창피하다. 태극기 대신 다양한 바람을 담은 깃발을 흔들며 “내 노후 책임져“라고 외치고 싶다.
박주동에게는 꿈이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요. 제가 96년 부터 현재까지 30년동안 영상을 찍고 기록을 했는데요, 그 영상들이 자꾸 소실되고 있어요. DB화가 안 되고 아카이빙이 안 되어서에요. 예전에는 영상을 비디오 테이프로 찍었는데 지금은 다 디지털로 바뀌었잖아요. 많은 비디오 테이프가 없어졌어요. 남아 있는 비디오 테이트도 다 열화현상이 생겨서 화질이 나빠졌고요. 이걸 빨리 DB화 해서 체계적으로 만들고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기록한 영상은 다 사라지거든요. 저는 이 작업을 하는 것에 인생 2막을 걸고 싶어요.“
꿈이라고해서 폼나고 원대한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눈꼽만큼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박주동에게 조용히 말했다.
”남을 위해 그만큼 살았으면 충분합니다. 남은 시간은 본인을 위해서 쓰시길.“
인터뷰어 : 문세경
세상에 맞서는 NGO활동가 18명의 진심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사우, 2021)를 썼다. 가난하고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 문세경님의 기사로 동시 게재됩니다.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영상 기록을 데이타베이스화 하는 게 저의 '꿈'입니다.
- 이음나눔유니온 박주동 활동가
2024년 6월 8일 33회 민족민주열사추모제 서명식 열사 영정들고 행진하는 모습 ⓒ 박주동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박주동(60)은 1991년에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 입사해 2016년에 퇴사했다. 정년을 십년이나 남긴 51세에 퇴사를 결심했을 때, 그를 아는 수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한다. 그는 왜 잘 다니던 안정적인 직장에서 서둘러 퇴직을 했을까?
”월급 제대로 받고, 고용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25년 동안 편하게 살았잖아요. 물론 노동조합 활동도 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요. 저와 같이 노조 활동 했던 사람들 중에 아파서 죽은 사람도 있고,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고, 활동에 온몸을 던지며 직장을 떠난 사람도 있었죠. 항상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만둔 거예요.“
1991년도에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 입사한 박주동은 입사 2년 만에 노동조합 위원장이 되어 10년 동안 일했다. 당시에는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생기기 전이라 회사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 소속된 사업장이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전인 1993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법외 단체가 있었다. 한국관세무역개발원 노동조합은 전노협이 출범하자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전노협에 가입했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면서 가장 성과가 컸던 것은 기능직으로 입사한 여성 직원들을 일반직으로 전환한 것이었어요. 여성 직원은 기능 4종으로 입사하면 퇴직할 때도 기능 4종으로 퇴직하거든요. 남성 직원들이 처음 입사 시 부여받던 일반직 6급보다 급여가 적었어요. 당시에는 우리 사업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남녀 차별이 심했어요. 제가 노조위원장을 두 번째로 할 때 요구했던 게 “직장내 성차별을 없애라“는 거였어요. 3년 정도 싸웠어요. 결국 사측과 교섭을 잘해서 기능직을 다 폐지했어요. 여성 직원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노조위원장으로 10년, 그 앞에 놓인 보람과 성과
2024년 5월. 민주노총 영상학교 노동자 영상패 역할과 과제 강의하는 박주동 ⓒ 박주동
박주동은 2007년 12월 13일 오후 2시에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외딴 산기슭에 읍장, 이장, 마을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관세무역개발원 노동조합 수련원 개원식을 한다. 수련원은 강의실, 관리동, 가족동, 식당 등 4개 동의 건물을 갖추고, 직원들의 휴양 및 워크샵 장소는 물론,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한다. 도·농간 상생의 장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으로 연간 이용객 1만명을 목표로 했다. 수련원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매년 1천 5백 명이 가은 수련원을 이용했다. 그 중 1천 명이 관세노조 조합원 및 가족들이었다. 또한 수련원은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교육을 할 때나 수련회를 위해 무료로 시설을 제공했다. 일종의 연대사업인 셈이다.
10년 동안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고 뒤돌아보니 의외로 성과와 보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건 아니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없으니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은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본인의 선택을 믿었다.
퇴직할 때 박주동의 나이는 51세였다. 일반적인 퇴직 나이보다 10년이나 일찍 퇴직했으니 또 다른 ’시작’이었다. 퇴직 후, 이런저런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2018년에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 서울 본부장 선거에 당선되어 1년 동안 활동했다. 2021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는 경기북부노동인권센터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2022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는 서대문노동자종합지원센터의 센터장을 맡아 일했다.
서울시는 2019년부터 '노동존중특별시 서울'을 표방하며, 서울 시내 모든 자치구에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과 복지 증진을 도모한 바 있다. 특히,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 보호 및 복지 증진에 집중키 위해 노동상담, 법률지원, 노동교육, 문화강좌 등을 제공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공약이었다.
“서울시 각 구에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만드는 일은 좋은 취지의 사업이었지만 말이 많았어요. 왜 세금으로 노동자 사업을 하느냐에서 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사업이라는 말까지 나왔었죠. 이를 추진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은 징계를 먹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동자종합지원센터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센터는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자처하면서 지역연대를 활성화시켰어요. 시민과 노동, 노동과 시민이 함께 하는 거점의 역할을 기꺼이 해냈거든요.
‘서대문마을네트워크’의 활동가분들을 만나고 열심히 교류했어요. 그분들은 열정은 있지만 조직화해서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없었고 저희는 노동조합을 경험했던 사람이니까 함께 활동하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표적인 사업이 &전태일의 풀빵 나눔&이었어요. 마을에서 축제를 할 때나 지역에서 투쟁하는 사업장에 풀빵을 구워서 나눠드렸어요. 2024년에 13번인가 했어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했어요. 주민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보람도 컸고.”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지역의 ‘ㅇㅇ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도 ㅇㅇ행사를 하니 참여하라는 문자가 온다. 가끔은 지역의 작은 영화관을 빌려 공동체 상영도 한다. 그럴때 재빨리 신청해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작년 12월에 계엄이 터지고 탄핵 집회를 할 때, 서대문마을넷 주민들과 함께 풀빵을 구워서 나눠주는 행사를 했어요. 엄청나게 긴 줄이 서 있었어요. 풀빵 굽기는 힘들었지만 풀빵을 구우면서 마을주민과 센터 활동가들의 간격이 많이 좁혀졌어요. 친밀감도 높아지고 정도 들었고요. 우리가 ‘으쌰으쌰‘ 하면 뭘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연대 활동이 왕성해 지니까 센터가 자연스럽게 지역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어요. 저는 ”언제든지 오셔서 쓰시라“고 했고요. 공간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어요. 목적의식을 앞세우면 거리감이 생겨요. 2년 동안 서대문노동자종합지원센터장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사람냄새 나는 조직을 만들었다는 거였어요. 일 할 맛이 났죠.”
비록 3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지만 그가 원했던 목표는 이루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남동리 이장'으로 불린 박주동
박주동은 안동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왔다. 어린시절의 그는 ‘반공소년‘이었다.
“안동댐 준공식을 할 때 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고 학교에서 청소를 시켰어요. 어린 마음에 대통령 할아버지가 온다고 하니까 청소를 열심히 했죠. 종이로 꽃도 만들고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휙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실망이 컸어요.그때부터 박정희를 싫어했어요(웃음).
남들이 보기에 모난 성격은 아니에요. 제 성격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저는 &거절&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직장생활 하고 노조생활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너무 예민하고 까칠하면 주변 사람이 피곤해한다는 걸 알았어요. 어떤 일을 해도 내가 마음이 편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편한 법이거든요. 항상 긴장되어 있고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스트레스 받고 긴장하거든요. 그래서 운동을 하든, 활동을 하든 즐겁게 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박주동의 온화한 품성은 9년간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공공운수노조 남동지구협의회 의장을 겸직할때도 잘 드러났다. ’투쟁은 즐겁게, 서로를 보살피고 챙기자‘는 마음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에 박주동은 ’남동리 이장’이라고 불리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한 손에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남자
이음나눔유니온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박주동 ⓒ 문세경
내가 처음 박주동을 보고 느낀 점은 왜소한 체격에 아무런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잘 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난 모습도 아니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남들은 행사가 있으면 참여자로 오지만 박주동은 늘 준비하는 사람, 치우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거기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말이다.
“1996년에 노동법 개정 투쟁할 때, 관세무역개발원노조 조합원들도 파업에 참여했어요. 그때 비디오 카메라가 하나 생겼어요. 비디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이었어요. 금속노조, 기아차노조, 현대차 노조에서도 행사나 집회때 카메라를 들고 찍더라고요. 각 노조의 영상 담당자들이 기록을 남기자고 영상패를 만들자고 했어요. 그때부터 저도 영상과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요즘은 영상작업을 디지털로 하지만 옛날에는 다 아날로그로 했어요. 노동자 뉴스제작단과 협업하고 서로 알려주면서 편집 기술 배우고, 노동자 미디어 활동단도 만들었어요. 2000년도에 대우자동차가 1,350명 해고 시킬 때, 부평 대우자동차 앞에서 경찰들한테 끌려 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대우자동차 영상패가 울면서 찍었어요. 그게 ‘기록‘이거든요.”
나는 집회나 행사에 가면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고 ’귀찮을텐데 한번도 빠트리지 않고 들고 다니네’라고 생각했다. 박주동은 ‘기록’에 대한 의무감이 컸다. ‘기록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 사라진 것은 되살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박주동에게 카메라를 들게 했다.
“1996년도 부터 찍은 비디오 테이프가 약 5천개가 있어요. 테잎으로 쵤영한 영상이 디지털화되고 메모리카드로 저장한 파일이 약 100테라정도 있고요. 기록된 영상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1만시간은 족히 넘겠네요(웃음).
이것을 정리하는 게 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에요. 또다른 버킷리스트는 마석모란공원 열사 묘역의 사계절을 찍는 거예요. 몇 년 전부터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했어요. 이게 보통작업이 아니거든요. 사계절을 찍으려면 1년 내내 다큐멘터리로 찍어야 하잖아요. 작년에 우연히 ‘열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어요. 처음엔 소소하게 몇 명만 모여서 만들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민주노총 영상패와 이름만 대면 알수 있는 민중가수들과 개인, 모란공원 지킴이 등 약 70여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어요. 그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이 최근에 한 일 중에 가장 보람되고 기뻤어요.”
기록하는 방법에는 글로 쓰고 활자화 하는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영상도 기록의 한 분야라는 걸 간과했다.
2023년 10월 24일 서대문노동자센터노동인권문화제시 참석자에게 인사말 하고 있는 박주동 ⓒ 박주동
박주동이 현재 가장 비중을 두는 곳은 ‘이음나눔유니온‘이다. 박주동은 ’이음나눔유니온‘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다. ’이음나눔유니온’은 퇴직을 하거나 퇴직을 앞둔 사람이 남은 삶을 외롭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 조직이다. 한국은 이미 고령화사회로 접어든지 오래다. 소득이 끊기고 관계가 단절되고 1인 가구(2024년 4월, 1인 가구 비율 41.8%. 행안부)로 산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을 하면 모든 게 단절돼요. 직장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때부터 혼자가 되는 거예요. 혼자되면 고립감이 커져요. 고립감이 들면 사람들 만나기가 싫죠. 직장생활 할 때는 사람들을 만나도 즐겁고 할 이야기도 있고 공통 관심사도 있는데 퇴직을 하면 사람을 만나도 할 얘기가 없어요. 그러다가 점점 고립되고 단절되죠. 그걸 막아야해요. ‘이음나눔유니온’의 조합원 90% 이상이 베이비부머 세대에요.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군부독재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고 민주화 시대까지 겪은 사람들이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겪은 소중한 분들을 방치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자신들이 경험하고 배운 것을 후배들한테 들려주고 좋은 것은 물려주면서 인생 2막을 지원하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음나눔유니온을 만든거예요.”
유럽에는 이미 퇴직자 노조가 있고 규모도 크다. 퇴직자 노조에 속해 사회 곳곳에서 자기 몫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 뼈빠지게 고생하며 산 것을 보상 받는 길은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고령사회를 대비하고 지원하는 조직이 있기는 하다. ‘대한노인회‘라고.
나는 ’대한노인회’에 나의 소중한 인생 2막을 맡기고 싶지 않다. 식민지 시대도 아닌데 태극기를 흔들며 나의 요구를 외치는 건 창피하다. 태극기 대신 다양한 바람을 담은 깃발을 흔들며 “내 노후 책임져“라고 외치고 싶다.
박주동에게는 꿈이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요. 제가 96년 부터 현재까지 30년동안 영상을 찍고 기록을 했는데요, 그 영상들이 자꾸 소실되고 있어요. DB화가 안 되고 아카이빙이 안 되어서에요. 예전에는 영상을 비디오 테이프로 찍었는데 지금은 다 디지털로 바뀌었잖아요. 많은 비디오 테이프가 없어졌어요. 남아 있는 비디오 테이트도 다 열화현상이 생겨서 화질이 나빠졌고요. 이걸 빨리 DB화 해서 체계적으로 만들고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기록한 영상은 다 사라지거든요. 저는 이 작업을 하는 것에 인생 2막을 걸고 싶어요.“
꿈이라고해서 폼나고 원대한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눈꼽만큼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박주동에게 조용히 말했다.
”남을 위해 그만큼 살았으면 충분합니다. 남은 시간은 본인을 위해서 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