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인터뷰 -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
청년의 일상에서 광장까지, 함께 꿈꾸는 변화
- 이지희 청년, 오늘 대표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이 결국 이 사회를 바꿔요. 우리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진짜 주체로 나서야 할 때잖아요.”
부산 청년들의 숨결이 모이는 ‘청년, 오늘’ 사무실을 찾았다. 이 공간에서는 책모임, 역사기행, 집회 준비, 웹진 제작까지. 공간은 늘 활기가 넘친다. 그 중심의 이지희 대표를 만나고 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청년이어서 가능한 일’과 ‘청년이기 때문에 겪는 일’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활동가 이지희? 그냥 이지희랑 다르지 않아요.”
‘청년, 오늘’은 단순한 소모임 공간이 아니다. 이지희 대표를 중심으로, 다양한 청년들이 사무국 활동가로 함께하고 있다.
“사무국이라고 해도 상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이 자원활동가로 참여해요. 기획팀, 홍보팀, 정책팀으로 나눠져 있고요. 웹진 만들고, 부스 기획도 같이했죠.”


이 조직 구조는 단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관계 기반의 풀뿌리 조직이다. 그리고 이 공간의 일상은 이지희 대표의 삶과 완전히 맞닿아 있다. 그는 활동가와 비활동가의 삶을 구분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곧 나니까요. 일상도 활동이고, 활동이 곧 내 삶이에요.” 그 말엔 무게가 담겨 있다. 삶과 일이 분리가 안되어 ‘소진된다’기보다 삶과 일이 서로 ‘스며든다’는 말이 더 와닿았다.
“처음부터 거리로 나설 생각은 없었어요.”
그녀의 사회 참여는 고등학교 자퇴라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사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생계가 우선이었죠.” 그렇게 자퇴하고 나서 찾은 인턴십 자리가 바로 ‘청년, 오늘’의 전신이었던 ‘청춘멘토’였다.
처음에는 그저 일하러 간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넓혀준 청년들을 만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의 문턱을 넘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래 복지정책을 연구하는 사람, 학문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점차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멋있어 보였고, 거리에서 사람들과 호흡하는 삶이 더 끌렸다고 한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책모임에 가고, 집회에 따라가면서 그는 느꼈다고 한다. ‘아, 이게 나한테도 할 수 있는 일이구나.’ 그때는 생각도 못 했던 일들을, 지금은 누군가에게 권하고 제안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앉아 있었어요. 구호도 못 외쳤어요. 근데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배우게 되더라고요.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막연하지 않구나.”
“사회자로 선 건, 진짜 예상 못 했어요.”
정치학을 공부하고, 이후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배경도 흥미롭다.
“정치외교학과 수업이 정말 좋았어요. 근데 정책 얘기만 하면 다들 결국 예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경제학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두 차례 입시를 거쳐 두 번의 신입생을 경험했다. 그녀에게 전공 변경은 단지 진로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시작되던 그때. 이 대표는 자원봉사로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광장을 가득 메운 청년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사회자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사회자로 광장에서 함께했다.
“대본을 쓰기는 했는데 문장보다는 키워드 중심으로 적었어요. 내가 준비한 멘트라 하더라도 내가 그대로 안한다는 걸 아니까.” 그는 오히려 사회자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잘 받아주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자는 돋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이크를 든 사람일 뿐이에요. 시민들이 주인이니까요.”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윤석열 탈옥’ 한 날. “행진 대열 기다리는데, 윤석열 석방이 현실이 되었어요.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그때 진짜 긴장됐어요. 근데 그런 순간에 진짜 침착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날, 부산의 남태령에서 가사없는 음원이 울려 퍼졌을 때…”

또 하나 기억나는 순간으로 음원이 없는 채로 행진을 시작해야 했던 날을 꼽았다. 준비한 USB를 들고있던 스텝은 박수영 의원 사무실에 갇히고, 음악은 없고. “그때 그냥 단체 메신저 돌렸죠. 음원 좀 누구 있냐” 다급한 현장에서 겨우 음원을 구해 행진트럭에서 틀었다. 못골고개를 넘고 있을 때 목을 잠깐 쉬어야겠어서 노래를 틀었어요. “음악 나올때만큼은 잠깐 쉬자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가사가 없는 MR파일인거예요. 쉬자 쉬자 했는데 가사가 없으니 당황했었는데 그래도 시민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며 음원을 가득 메워주시더라고요. 시민들의 분노와 열기로 2시간 가까이 되는 행진을 할 수 있었어요. 잊을 수 없는 날이죠.”
“이건 진짜 내가 잘했다 싶은 순간은…”

광장이 이어지면서 그녀는 고민했다. '우리가 이렇게 모였는데, 이 힘을 어떻게 더 오래 갈 수 있게 하지?' 그래서 제안한 게 ‘청년 집회 기획단’이었다. “처음엔 진짜,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했는데, 20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였어요.”
그들은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었다. 직접 문구도 쓰고, 행진 구호도 정하고, 마이크도 잡았다. “광장을 빛냈던 청년들이 직접 집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어요. 이들의 힘으로 매일 집회를 해낼 수 있었죠.”
“가끔 무서울 정도로 큰 부담감이 밀려와요.”
그녀에게도 물론 어려운 순간은 있다. 외롭다는 느낌보다는 부담감이 너무 클 때. “아, 나 이거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이 시대가 나한테 준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감당하고 싶어져요.”
그렇기에 그녀는 더 오래 가고 싶다고 한다. “딱 한순간 불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래오래 세상을 바꿔나가는 활동가이고 싶어요.”
“부산 청년들이 떠나는 이유, 붙잡고 싶은 이유”
하반기엔 ‘청년백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부산에서 청년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직접 물어보고 기록하고 싶어요. 다들 부산은 청년들이 떠나는 도시라고 하지만, 사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거든요. 이 현실을 담고 싶어요.”
정기회원모임도 정례화하고, 부마역사기행도 기획 중이다.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게 구상하고 있다.
“지금보다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돼요.”

마음은 앞서지만 실천이 어려운 이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지금도 각자 하고 있는 방식이 있을 거예요. 후원하기, 영상 보기, 댓글 달기...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보면 어때요?”
그 한 걸음이 결국 광장으로 이어지고, 관계로 이어지고, 연대로 이어진다.
“딱 한 번, 용기 내서 나와보면 알게 돼요. 이게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근데 동시에, 이게 진짜 세상을 바꾸는 일이구나.”
“청년정치, 이젠 진짜 우리 손에 쥐어야죠.”
이 대표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건 청년의 정치세력화다. “이제는 주목만 받는 시대는 끝났으면 좋겠어요. 청년이 진짜 힘을 가져야 해요.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그는 이번 광장을 통해 그 가능성을 봤다고 말한다. “한 명 한 명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상상, 그게 현실이 되려면 공간이 필요해요. 부산에서 청년, 오늘은 청년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게 목표에요. 그렇게 같이 손잡고 나아가야죠.”
인터뷰 내내 그녀의 말투는 조곤조곤하고 또렷했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눈빛은, 그가 단지 ‘대표’여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이자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동지들과 함께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듯했다.
글쓴이 : 노현석 (부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습니다. 12.3 계엄 이후, 꾸준히 광장을 만들고 참여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광장을 함께 만들어간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광장을 열기 위해 집회신고부터 무대설치, 공연 섭외, 발언자 선정, 참여자 안전, 홍보까지. 분야를 넘어 매주 거리에서 광장을 만들고, 지키고, 지원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로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 변화에 있어 시민사회 활동가의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획인터뷰 -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
청년의 일상에서 광장까지, 함께 꿈꾸는 변화
- 이지희 청년, 오늘 대표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이 결국 이 사회를 바꿔요. 우리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진짜 주체로 나서야 할 때잖아요.”
부산 청년들의 숨결이 모이는 ‘청년, 오늘’ 사무실을 찾았다. 이 공간에서는 책모임, 역사기행, 집회 준비, 웹진 제작까지. 공간은 늘 활기가 넘친다. 그 중심의 이지희 대표를 만나고 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청년이어서 가능한 일’과 ‘청년이기 때문에 겪는 일’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활동가 이지희? 그냥 이지희랑 다르지 않아요.”
‘청년, 오늘’은 단순한 소모임 공간이 아니다. 이지희 대표를 중심으로, 다양한 청년들이 사무국 활동가로 함께하고 있다.
“사무국이라고 해도 상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이 자원활동가로 참여해요. 기획팀, 홍보팀, 정책팀으로 나눠져 있고요. 웹진 만들고, 부스 기획도 같이했죠.”
이 조직 구조는 단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관계 기반의 풀뿌리 조직이다. 그리고 이 공간의 일상은 이지희 대표의 삶과 완전히 맞닿아 있다. 그는 활동가와 비활동가의 삶을 구분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곧 나니까요. 일상도 활동이고, 활동이 곧 내 삶이에요.” 그 말엔 무게가 담겨 있다. 삶과 일이 분리가 안되어 ‘소진된다’기보다 삶과 일이 서로 ‘스며든다’는 말이 더 와닿았다.
“처음부터 거리로 나설 생각은 없었어요.”
그녀의 사회 참여는 고등학교 자퇴라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사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생계가 우선이었죠.” 그렇게 자퇴하고 나서 찾은 인턴십 자리가 바로 ‘청년, 오늘’의 전신이었던 ‘청춘멘토’였다.
처음에는 그저 일하러 간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넓혀준 청년들을 만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의 문턱을 넘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래 복지정책을 연구하는 사람, 학문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점차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멋있어 보였고, 거리에서 사람들과 호흡하는 삶이 더 끌렸다고 한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책모임에 가고, 집회에 따라가면서 그는 느꼈다고 한다. ‘아, 이게 나한테도 할 수 있는 일이구나.’ 그때는 생각도 못 했던 일들을, 지금은 누군가에게 권하고 제안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앉아 있었어요. 구호도 못 외쳤어요. 근데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배우게 되더라고요.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막연하지 않구나.”
“사회자로 선 건, 진짜 예상 못 했어요.”
정치학을 공부하고, 이후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배경도 흥미롭다.
“정치외교학과 수업이 정말 좋았어요. 근데 정책 얘기만 하면 다들 결국 예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경제학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두 차례 입시를 거쳐 두 번의 신입생을 경험했다. 그녀에게 전공 변경은 단지 진로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시작되던 그때. 이 대표는 자원봉사로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광장을 가득 메운 청년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사회자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사회자로 광장에서 함께했다.
“대본을 쓰기는 했는데 문장보다는 키워드 중심으로 적었어요. 내가 준비한 멘트라 하더라도 내가 그대로 안한다는 걸 아니까.” 그는 오히려 사회자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잘 받아주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자는 돋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이크를 든 사람일 뿐이에요. 시민들이 주인이니까요.”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윤석열 탈옥’ 한 날. “행진 대열 기다리는데, 윤석열 석방이 현실이 되었어요.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그때 진짜 긴장됐어요. 근데 그런 순간에 진짜 침착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날, 부산의 남태령에서 가사없는 음원이 울려 퍼졌을 때…”
또 하나 기억나는 순간으로 음원이 없는 채로 행진을 시작해야 했던 날을 꼽았다. 준비한 USB를 들고있던 스텝은 박수영 의원 사무실에 갇히고, 음악은 없고. “그때 그냥 단체 메신저 돌렸죠. 음원 좀 누구 있냐” 다급한 현장에서 겨우 음원을 구해 행진트럭에서 틀었다. 못골고개를 넘고 있을 때 목을 잠깐 쉬어야겠어서 노래를 틀었어요. “음악 나올때만큼은 잠깐 쉬자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가사가 없는 MR파일인거예요. 쉬자 쉬자 했는데 가사가 없으니 당황했었는데 그래도 시민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며 음원을 가득 메워주시더라고요. 시민들의 분노와 열기로 2시간 가까이 되는 행진을 할 수 있었어요. 잊을 수 없는 날이죠.”
“이건 진짜 내가 잘했다 싶은 순간은…”
광장이 이어지면서 그녀는 고민했다. '우리가 이렇게 모였는데, 이 힘을 어떻게 더 오래 갈 수 있게 하지?' 그래서 제안한 게 ‘청년 집회 기획단’이었다. “처음엔 진짜,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했는데, 20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였어요.”
그들은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었다. 직접 문구도 쓰고, 행진 구호도 정하고, 마이크도 잡았다. “광장을 빛냈던 청년들이 직접 집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어요. 이들의 힘으로 매일 집회를 해낼 수 있었죠.”
“가끔 무서울 정도로 큰 부담감이 밀려와요.”
그녀에게도 물론 어려운 순간은 있다. 외롭다는 느낌보다는 부담감이 너무 클 때. “아, 나 이거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이 시대가 나한테 준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감당하고 싶어져요.”
그렇기에 그녀는 더 오래 가고 싶다고 한다. “딱 한순간 불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래오래 세상을 바꿔나가는 활동가이고 싶어요.”
“부산 청년들이 떠나는 이유, 붙잡고 싶은 이유”
하반기엔 ‘청년백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부산에서 청년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직접 물어보고 기록하고 싶어요. 다들 부산은 청년들이 떠나는 도시라고 하지만, 사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거든요. 이 현실을 담고 싶어요.”
정기회원모임도 정례화하고, 부마역사기행도 기획 중이다.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게 구상하고 있다.
“지금보다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돼요.”
마음은 앞서지만 실천이 어려운 이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지금도 각자 하고 있는 방식이 있을 거예요. 후원하기, 영상 보기, 댓글 달기...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보면 어때요?”
그 한 걸음이 결국 광장으로 이어지고, 관계로 이어지고, 연대로 이어진다.
“딱 한 번, 용기 내서 나와보면 알게 돼요. 이게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근데 동시에, 이게 진짜 세상을 바꾸는 일이구나.”
“청년정치, 이젠 진짜 우리 손에 쥐어야죠.”
이 대표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건 청년의 정치세력화다. “이제는 주목만 받는 시대는 끝났으면 좋겠어요. 청년이 진짜 힘을 가져야 해요.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그는 이번 광장을 통해 그 가능성을 봤다고 말한다. “한 명 한 명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상상, 그게 현실이 되려면 공간이 필요해요. 부산에서 청년, 오늘은 청년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게 목표에요. 그렇게 같이 손잡고 나아가야죠.”
인터뷰 내내 그녀의 말투는 조곤조곤하고 또렷했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눈빛은, 그가 단지 ‘대표’여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이자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동지들과 함께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