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인터뷰 -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
수원에서도 광장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 계엄 정국 속 시민의 연대를 이끌어낸 지역 활동가, 최승재의 이야기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비상계엄령은 대한민국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다. 많은 이들이 “설마”라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민들은 곧바로 거리로 나섰고,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이 꾸려지며 광장은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그 중심엔 늘 ‘서울’이 있었다. 뉴스도, 영상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대부분 서울에 집중됐다.
그 와중에 수원에서, 광장의 불씨를 지키며 외로이 싸워온 이들이 있다. 수원에서 17년째 평화통일운동에 참여해온 최승재 수원6.15평화연대 집행위원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계엄령 발표 당일 여의도로 달려간 그날부터, 수원역 앞에서 이어진 123일의 광장까지 최승재 위원장의 이야기는 ‘서울 밖 광장’의 기록이다.
분단을 넘는 마음, 공익활동가의 길 위에 서다
최승재 위원장이 시민사회 활동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학 졸업 이후였다. 하지만 그 시작은 이미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통해 움트고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평화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분단은 단지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근본적 문제라는 자각이었다.
그는 평화통일 활동가로 대학생활을 했던 수원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 그는 ‘수원6.15평화연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수원6.15평화연대는 군사훈련 반대 운동, 평화통일 교육, 그리고 1995년부터 이어진 수원시민통일한마당 등 지역사회 기반의 평화운동을 이어오는 단체다. 수도권이지만 서울의 그림자에 가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해야 했던 수원, 그곳에서 그는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17년간 묵묵히 이어오고 있다.

최 위원장이 활동 중인 수원6.15평화연대가 2018년 주최한 ‘제24회 수원시민통일한마당’.
계엄령 이후의 결심, 수원비상행동의 탄생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발표 소식은 카카오톡 메시지로 그에게 전해졌다. “처음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고 말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여의도로 향했다. 이미 계엄령이 해제된 뒤였지만, 광장엔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시민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계엄은 끝난 게 아니었어요. 시민의 분노는 계속되고 있었죠.”
사실 그는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지역 시민사회 내부에서 대응이 필요하다고 느껴왔다. 그 문제의식을 공유한 지역의 정당, 노동계, 시민단체, 종교계 등과 함께 ‘수원시국회의’를 꾸렸고, 그는 논의와 실천의 중심에서 움직였다. 시국회의는 정부의 각종 폭주에 맞서 다양한 공동행동을 조직했고, 점차 지역에 뿌리내린 연대로 확장해 나갔다.
12.3 계엄령 사태를 기점으로, 수원시국회의는 자연스럽게 ‘수원비상행동’으로 전환됐다. 수원의 3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연대체는 거리로 나가, 수원의 광장을 지키는 주체가 되었다.
“서울은 크고 힘 있는 광장이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몫을 하기로 한 거죠.”

2024년 12월 12일 수원역 문화광장 집회에서 윤석열 탄핵 국회가결을 요구하는 수원 시민들.
수원역에서의 123일, 작은 광장의 기록
수원비상행동은 계엄령 이후 123일 동안 수원역 앞에서 약 15회 집회를 열었다. 평일 저녁마다 열린 이 집회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시민과 시민이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선전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것마저 ‘집회’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시민들이 말하고 싶은 게 많았던 거라고 그는 해석했다. 집회는 자연스럽게 시민 발언 중심으로 구성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대 여성의 발언이었고 한다.
“단체 대표들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었어요. 시민들이 직접 나서 이야기하는 그 힘이 광장의 진짜 에너지였죠.”
평일에는 수원에서 집회를 열고, 주말에는 서울 집회에 참여했다. 서울 집회의 규모에 비해 수원은 소박했지만,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마음이었어요. 크든 작든, 그 마음이 모이면 변화는 시작됩니다.”

2025년 2월 1일 광화문 비상행동 집회에 참석한 최 위원장.
커피 한 잔, 김밥 한 줄, 그리고 연대의 온기
수원광장은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로 유지됐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수원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어요. 누군가 지나가며 음료수를 건네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선결제 해주고 가기도 했죠.”
그는 이런 따뜻한 연대를 기억한다.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하는 시민들. 그것이 이 활동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그가 말하는 광장은 단지 외치는 공간이 아니라, ‘지켜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수원역 앞이라는 장소적 특성으로 때로는 취객의 방해나 종교인의 항의도 있었던 것. 이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이처럼 개인의 자발적 연대는 크고 작게 광장의 온기를 지켜냈지만, 조직 간의 연대는 그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단체마다 각자의 현안을 해결하기도 벅찬데다 상근 인력도 부족하니, 아무래도 비상행동에 장기적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그게 아쉬워요. 아직 다 끝난 게 아닌데, 동력은 자꾸 떨어지고...”
최 위원장의 아쉬움은, 함께 분노하고 싸웠던 기억들이 너무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믿는다.
“광장을 만들고 지키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위해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게 연대는 단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그 연대의 힘이 다시 확인되었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처럼, 최 위원장은 지금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
탄핵의 날, 그리고 광장 이후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최 위원장은 촛불행동과 함께 수원에서 4대의 버스를 준비해 시민들과 여의도로 향했다.
“혼자 가기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 함께 가자고 했어요.”
그날 버스에 오른 시민들 가운데는 2030세대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사실 저도 편견이 있었죠. 근데 2030 세대가 이번에 보여준 용기와 행동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국민은 위대하다는 말, 그게 헌법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눈으로 확인한 거예요.”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탄핵 가결을 염원하며 최 위원장은 촛불행동과 함께 수원에서 버스 4대로 여의도 국회 앞으로 향했다.
우리가 바라는 광장, 다시 시민의 일상으로
“대규모가 아니어도,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광장이 필요해요.”
최 위원장이 꿈꾸는 광장은 그렇게 작고 조용한 공간이다. 과거처럼 시민단체가 모든 걸 주도하기보다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일상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 서는 공간.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그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다. 그가 말하는 ‘광장’은 단순히 계엄 정국에 대응하는 비상한 공간이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내고 확장하는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몸담아온 평화운동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수원6.15평화연대의 과제는 여전히 ‘한반도 평화’다.
“내란세력의 청산 없이는 그 어떤 개혁도 진전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평화를 등한시한 그 세력을 넘어서야 합니다.”
지역에서, 작지만 끈질기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광장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는 활동가가 결코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저희도 똑같은 국민이고, 같은 시민이에요.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이 있을 뿐이죠.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다 보면, 때로는 동지 같은 관계로까지 이어지기도 해요. 각자 추구하는 바는 다를지라도,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지켜온 수많은 주말의 광장, 그 뒤에는 가족의 시간이 있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부터 그는 수원역 앞에서 80회 넘는 집회를 이어왔다. 거의 매주 주말마다 거리로 나가니, 처음엔 가족의 불만도 컸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할 시간은 광장에서 흘러갔고, 아내는 점점 지쳐갔다.
“지금은 아이들이 좀 커서 같이 집회에 나가기도 해요. 아내도 많이 이해해주고 있고요. 고맙죠. 가족에게 늘 미안하면서도... 결국 제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글쓴이 : 나현윤
사회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습니다. 12.3 계엄 이후, 꾸준히 광장을 만들고 참여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광장을 함께 만들어간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광장을 열기 위해 집회신고부터 무대설치, 공연 섭외, 발언자 선정, 참여자 안전, 홍보까지. 분야를 넘어 매주 거리에서 광장을 만들고, 지키고, 지원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로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 변화에 있어 시민사회 활동가의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획인터뷰 -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
수원에서도 광장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 계엄 정국 속 시민의 연대를 이끌어낸 지역 활동가, 최승재의 이야기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비상계엄령은 대한민국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다. 많은 이들이 “설마”라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민들은 곧바로 거리로 나섰고,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이 꾸려지며 광장은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그 중심엔 늘 ‘서울’이 있었다. 뉴스도, 영상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대부분 서울에 집중됐다.
그 와중에 수원에서, 광장의 불씨를 지키며 외로이 싸워온 이들이 있다. 수원에서 17년째 평화통일운동에 참여해온 최승재 수원6.15평화연대 집행위원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계엄령 발표 당일 여의도로 달려간 그날부터, 수원역 앞에서 이어진 123일의 광장까지 최승재 위원장의 이야기는 ‘서울 밖 광장’의 기록이다.
분단을 넘는 마음, 공익활동가의 길 위에 서다
최승재 위원장이 시민사회 활동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학 졸업 이후였다. 하지만 그 시작은 이미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통해 움트고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평화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분단은 단지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근본적 문제라는 자각이었다.
그는 평화통일 활동가로 대학생활을 했던 수원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 그는 ‘수원6.15평화연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수원6.15평화연대는 군사훈련 반대 운동, 평화통일 교육, 그리고 1995년부터 이어진 수원시민통일한마당 등 지역사회 기반의 평화운동을 이어오는 단체다. 수도권이지만 서울의 그림자에 가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해야 했던 수원, 그곳에서 그는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17년간 묵묵히 이어오고 있다.
최 위원장이 활동 중인 수원6.15평화연대가 2018년 주최한 ‘제24회 수원시민통일한마당’.
계엄령 이후의 결심, 수원비상행동의 탄생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발표 소식은 카카오톡 메시지로 그에게 전해졌다. “처음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고 말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여의도로 향했다. 이미 계엄령이 해제된 뒤였지만, 광장엔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시민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계엄은 끝난 게 아니었어요. 시민의 분노는 계속되고 있었죠.”
사실 그는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지역 시민사회 내부에서 대응이 필요하다고 느껴왔다. 그 문제의식을 공유한 지역의 정당, 노동계, 시민단체, 종교계 등과 함께 ‘수원시국회의’를 꾸렸고, 그는 논의와 실천의 중심에서 움직였다. 시국회의는 정부의 각종 폭주에 맞서 다양한 공동행동을 조직했고, 점차 지역에 뿌리내린 연대로 확장해 나갔다.
12.3 계엄령 사태를 기점으로, 수원시국회의는 자연스럽게 ‘수원비상행동’으로 전환됐다. 수원의 3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연대체는 거리로 나가, 수원의 광장을 지키는 주체가 되었다.
“서울은 크고 힘 있는 광장이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몫을 하기로 한 거죠.”
2024년 12월 12일 수원역 문화광장 집회에서 윤석열 탄핵 국회가결을 요구하는 수원 시민들.
수원역에서의 123일, 작은 광장의 기록
수원비상행동은 계엄령 이후 123일 동안 수원역 앞에서 약 15회 집회를 열었다. 평일 저녁마다 열린 이 집회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시민과 시민이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선전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것마저 ‘집회’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시민들이 말하고 싶은 게 많았던 거라고 그는 해석했다. 집회는 자연스럽게 시민 발언 중심으로 구성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대 여성의 발언이었고 한다.
“단체 대표들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었어요. 시민들이 직접 나서 이야기하는 그 힘이 광장의 진짜 에너지였죠.”
평일에는 수원에서 집회를 열고, 주말에는 서울 집회에 참여했다. 서울 집회의 규모에 비해 수원은 소박했지만,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마음이었어요. 크든 작든, 그 마음이 모이면 변화는 시작됩니다.”
2025년 2월 1일 광화문 비상행동 집회에 참석한 최 위원장.
커피 한 잔, 김밥 한 줄, 그리고 연대의 온기
수원광장은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로 유지됐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수원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어요. 누군가 지나가며 음료수를 건네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선결제 해주고 가기도 했죠.”
그는 이런 따뜻한 연대를 기억한다.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하는 시민들. 그것이 이 활동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그가 말하는 광장은 단지 외치는 공간이 아니라, ‘지켜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수원역 앞이라는 장소적 특성으로 때로는 취객의 방해나 종교인의 항의도 있었던 것. 이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이처럼 개인의 자발적 연대는 크고 작게 광장의 온기를 지켜냈지만, 조직 간의 연대는 그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단체마다 각자의 현안을 해결하기도 벅찬데다 상근 인력도 부족하니, 아무래도 비상행동에 장기적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그게 아쉬워요. 아직 다 끝난 게 아닌데, 동력은 자꾸 떨어지고...”
최 위원장의 아쉬움은, 함께 분노하고 싸웠던 기억들이 너무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믿는다.
“광장을 만들고 지키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위해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게 연대는 단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그 연대의 힘이 다시 확인되었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처럼, 최 위원장은 지금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
탄핵의 날, 그리고 광장 이후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최 위원장은 촛불행동과 함께 수원에서 4대의 버스를 준비해 시민들과 여의도로 향했다.
“혼자 가기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 함께 가자고 했어요.”
그날 버스에 오른 시민들 가운데는 2030세대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사실 저도 편견이 있었죠. 근데 2030 세대가 이번에 보여준 용기와 행동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국민은 위대하다는 말, 그게 헌법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눈으로 확인한 거예요.”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탄핵 가결을 염원하며 최 위원장은 촛불행동과 함께 수원에서 버스 4대로 여의도 국회 앞으로 향했다.
우리가 바라는 광장, 다시 시민의 일상으로
“대규모가 아니어도,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광장이 필요해요.”
최 위원장이 꿈꾸는 광장은 그렇게 작고 조용한 공간이다. 과거처럼 시민단체가 모든 걸 주도하기보다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일상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 서는 공간.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그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다. 그가 말하는 ‘광장’은 단순히 계엄 정국에 대응하는 비상한 공간이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내고 확장하는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몸담아온 평화운동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수원6.15평화연대의 과제는 여전히 ‘한반도 평화’다.
“내란세력의 청산 없이는 그 어떤 개혁도 진전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평화를 등한시한 그 세력을 넘어서야 합니다.”
지역에서, 작지만 끈질기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광장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는 활동가가 결코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저희도 똑같은 국민이고, 같은 시민이에요.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이 있을 뿐이죠.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다 보면, 때로는 동지 같은 관계로까지 이어지기도 해요. 각자 추구하는 바는 다를지라도,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지켜온 수많은 주말의 광장, 그 뒤에는 가족의 시간이 있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부터 그는 수원역 앞에서 80회 넘는 집회를 이어왔다. 거의 매주 주말마다 거리로 나가니, 처음엔 가족의 불만도 컸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할 시간은 광장에서 흘러갔고, 아내는 점점 지쳐갔다.
“지금은 아이들이 좀 커서 같이 집회에 나가기도 해요. 아내도 많이 이해해주고 있고요. 고맙죠. 가족에게 늘 미안하면서도... 결국 제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