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인터뷰 -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
손 내밀고 손 잡아주는 연대의 힘을 체감한 광장에서 123일
-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김혜란 활동가
12.3 계엄 이후 거리로 나온 시민들. 그들이 모일 수 있었던 곳엔 언제나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 중 하나였던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이하 참여연대) 활동가 김혜란님을 만나, ‘광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들어보았다.

Q.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직후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집에서 애들 재우고 있었어요. 평소처럼 조용한 밤이었는데, 단톡방에 "계엄"이라는 메시지가 올라왔죠. 처음에는 ‘가짜뉴스겠지' 했어요. 그런데 TV에 헬기가 국회에 착륙하는 장면이 나오고, 군인들이 유리창 깨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더라요. 이게 진짜라고? 이게 2024년이라고? 그날 밤 거의 뜬눈으로 새웠고, 머릿속은 복잡했어요. 참여연대는 다음날 새벽 6시에 사무실로 모이기로 했고, 바로 나갔죠.
아침에 준비하는데 아이가 묻더라고요. 아들이 그 당시 6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5.18을 배우고 있었거든요. 광주도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 기억이 있었나봐요. “엄마, 그거 전두환이 했던 거잖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죽는 거야?”라고 물었어요.
광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Q. 아이의 질문이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역사가 어떻게 현재로 소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네요. 지역에서는 어떻게 대응이 시작됐나요?
저희는 상황 발생 직후 바로 움직였어요. 오송 참사 이후 꾸려졌던 시민대책위가 작동하고 있었고, 참여연대도 그 안에 있었거든요. 이미 연결망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선전전 하자고 하니까 다들 바로 반응했어요. 그날 새벽에 피켓 만들고, 유인물도 인쇄하고, 성명서도 냈죠. 충북에서는 제일 먼저 계엄 관련 성명을 냈던 걸로 기억해요.
집회는 123일 동안 이어졌다. 탄핵 결정이 가까워지면서 매일 촛불을 들었다. 광장에서 유인물을 나누고 발언 순서를 짜는 일은 반복됐고, 리듬처럼 돌아갔다. 계엄 다음날 오전에 바로 집행위가 꾸려지고 공동집행위원장이 선정되었다. 홍보팀은 유인물과 현수막을, 언론팀은 성명서와 집회 일정 조율을, 조직팀은 집회 기획을 조정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2월 3일 계엄이 터지고, 4월 4일 파면될 때까지 123일. 우리는 단 하루도 광장을 비우지 않았어요.”
(사진4_ 김혜란 광장에서)
세대의 자리, 광장의 방향
Q. 광장을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한 학생이 “엄마가 맨날 촛불 들고 나가서 안 나가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서 같이 왔어요”라고 발언한 게 기억나요. 웃겼지만 찡했어요. 서울 집회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놀랐어요. 우리는 초를 들고 조용히 모이는데, 서울은 “삐딱하게”, “다만세” 같은 아이돌 노래가 나오고, 응원봉을 들고 있더라고요. 이 경험을 지역으로 가져와서 응원봉도 구매하고 분위기를 바꿨죠. 이 과정에서 광장의 주체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젊은 친구들 정치에 관심도 없고 참여 안하는 것 같고 그랬는데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눈으로 보니 감동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더라구요. 그리고 내가 물러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거구나 우리 선배들도 이 경험들을 다 하셨겠구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구나 싶었죠. 나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잖아요. 한 발짝 물러서는 세대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충북대 학생들의 참여는 그래서 더욱 빛났다.
“그 친구들은 학교 안에서 따로 조직도 꾸리고, 스스로 연대했어요. 그게 참 고맙고 대견했어요.”
지역의 광장을 지키는 사람들
Q. 참여연대 내부에서는 어떤 원칙을 갖고 있었나요?
간단했어요. "광장을 비우지 말자." 그게 다였죠. 평일이든 주말이든, 사람이 많든 적든, 분위기가 좋든 안 좋든 간에 우리는 매일 나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원도 줄고 광장 분위기가 침체되기도 했고, 서울 집회에 참석하고 싶기도 했지만, 저희는 지역 광장을 지키기로 했어요. 우리가 서울로 가버리면 지역의 광장은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으니까 지역의 광장을 지켜야된다는 생각이었어요.
Q. 삼보일배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그게 사실 저희가 사전에 기획한 게 아니라 이틀 전에 제안한 거였어요.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삼보일배라도 하자”고 제의했고, 그게 현실이 된 거예요. 어떻게 골라도 제일 힘든 삼보일배를 골랐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때도 진짜 고마웠었어요. 저희는 1시간이면 될 줄 알았거든요. 택도 없더라고요. 길고 힘들었지만 다들 말없이 해줬어요. 연세 많으신 대표님들도 선뜻 같이 걸으셨어요. 감동이었죠.
“그래, 이 힘으로 우리 또 가는 거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진4_ 김혜란 거리행진)
정치는 바뀌어야 한다, 시민이 바꿔야 한다
Q. 매일 광장을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진짜 힘들었어요. 저녁 집회 끝나면 집에 9시 넘어 들어가고, 아이들은 배달 음식에 질려 있고, 몸도 마음도 지치는 날이 많았죠.
Q. 광장을 운영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이번 집회 때 이야기했었던 게 “혐오, 차별을 배제하자” 였어요. 누구나 광장에서 발언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발언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상처받으면 안 된다는 요구가 있었는데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성별이 모이다보니 그게 어렵더라구요. 크게 마찰이 있지는 않았는데 군데군데에서 불편함이 나오는 거죠. 예를 들어 “윤석열 멧돼지 같은 놈” 이런 말요. 어떤 분에겐 분노의 표현이지만, 다른 분들은 불편해하죠. 그래서 자유발언 전에 부탁드렸어요. "표현은 자유지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해주세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다들 지켜주시더라구요.
Q.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게 있을까요?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좀 더 재미있게 할 수는 없었을까?”예요. 저희가 집회를 운영하면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겁다’, ‘어렵다’는 말이었거든요. 사실 이해돼요. 우리가 박근혜를 탄핵시켰을 때 다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구나’ 기대했잖아요. 근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고 나서도 우리가 기대했던 개혁이 전부 이루어진 건 아니었고, 오히려 후퇴한 부분도 많았죠. 그게 되게 뼈아픈 교훈이었어요. 그래서 윤석열 파면도 단순히 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됐어요. 그런 문제의식을 담으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집회 내용도 무거워지고, 의제 중심으로 흘러간 것 같아요.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냥 “윤석열 내려와” 이 얘기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는데, 와보면 어려운 얘기 나오고 무거운 분위기고, 그러니까 거리감이 생긴 거죠.
서울은 자유발언이 되게 열려 있었고, 거기서 차별 철폐나 성소수자 권리 같은 얘기도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파면 이후 사회에 대해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대요. 우리 지역에서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담지 못했던 게 좀 아쉬워요. 참여한 시민들도 보면, 젊은 세대는 다 서울로 갔더라고요. “우리 딸은 서울 촛불 갔어요” 이런 말들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에서도 지역의 동력이 빠져나간 느낌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도 다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람을 참여시키는 건 늘 어렵죠. 이건 활동하면서도 계속 느끼는 부분이에요. SNS도 지역에서는 활용에 한계가 있죠. 커뮤니티 기반도 약하고. 그렇다고 기존 방식만 고수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더 많이 고민이 남았던 것 같아요. 집회가 끝난 뒤에 ‘우리가 목소리는 냈는데, 다음을 준비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했나?’라는 질문도 계속 들고요. 다음에는 그 간격을 줄이는 걸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4_ 김혜란 시국선언)
시민사회는 아직 유효하다
Q. 앞으로 시민사회가 만들어갈 광장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시나요?
요즘 “시민사회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 “시민단체가 꼭 필요하냐?”는 질문을 많이 듣죠.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활동가들이 정당 활동이나 정치 영역으로 가기도 해요. 제도나 법을 바꾸는 건 결국 국회, 의회가 하는 거고, 실제 조례나 정책도 정치권이 주도하니까요. 그러다 보면 ‘그럼 시민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이 생겨요.
그런데 이번 광장 경험을 통해 다시 확신했어요. 여전히 정치권이나 행정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그게 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걸요. 제도나 정책을 만들기 전에 문제를 발굴하고, 공론화하고, 목소리를 모으는 일. 그건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직도 우리 활동은 유효하다는 걸 느꼈어요.
다만 숙제는 있어요. 시민들과의 소통을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전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그럼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죠. 젊은 청년들과의 소통도 중요하고, 반대로 실버 세대가 많아지는 흐름도 무시할 수 없어요. 함께할 수 있는 의제와 방식이 뭘까, 그걸 찾아야 해요.
다음 광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누구와, 어떤 말로, 어떤 방식으로. 그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가져가야 할 숙제예요.
Q. 100명을 광장에 부를 수 있다면 누구를 부르고 싶으세요?
제일 힘든 사람들과, 제일 결정권 있는 사람들. 같이 앉아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어요. 누구는 일자리를 잃었는데, 누군가는 밤마다 축제를 열고 있어요. 이건 너무 불균형하잖아요. 도청에 오송 참사 추모 표지석 하나 세우는 데도 여론조사 먼저 한다더라고요. 왜 그런 거에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자리에서 말이라도 듣는 시간, 꼭 필요해요.
참여연대 활동가로 산다는 것

(사진 5_ 김혜란 민우회)
Q. 참여연대 활동은 얼마나 되셨고,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지금 13년 차예요. 근데 여전히 막내예요. 저는 청주대학교 나왔고, 학생운동을 아주 찐하게 오래 했어요. 시민운동은 처음엔 충북여성민우회라는 여성단체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단체가 내부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다음 걸음을 고민하게 됐죠.
시민운동은 계속하고 싶은데 노조는 제 체질엔 안 맞을 것 같고, 그러던 차에 주변에서 참여연대를 추천해줬어요. 사실 충북에 있는 대부분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거든요. 그 인연 덕에 자연스럽게 참여연대로 오게 됐어요.
그리고 여기서 제 남편도 만났어요. 결혼할 때 얘기도 재밌어요. 신랑을 소개해준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거든요. 시민사회 선배들이 다 각자 따로 소개해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같은 사람이었어요. 지역 시민사회 전체가 우리 연애를 밀어준 느낌이었죠. 결혼할 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어요. 저희 시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뵌 적은 없는데, 지역 어른들이 정말 많이 축하해주셨어요. (*시아버님은 상생과 연대의 시민운동 정신을 실천하신 故최병준 선생님이다.)
Q. 참여연대 활동 중에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참여연대에 들어와서 제일 좋았던 순간이 이 단체가 진짜 ‘회원의 힘’으로 굴러가는 걸 눈으로 확인했을 때예요. 그걸 느낄 때마다 ‘내가 이래서 여기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참여연대가 갑작스럽게 공간을 옮겨야 했는데 돈이 없었거든요. 그때 회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사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바로 도와주셨고, 그 덕분에 우리가 이사할 수 있었어요.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회원들에게 이야기하면,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세요. 그럴 때마다 이 단체의 내공이 얼마나 단단한지 실감해요.
어디 가서 “저 참여연대에서 일합니다” 하면, “아, 참여연대! 알죠”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강태재’, ‘송재봉’처럼 참여연대와 연결된 이름들을 떠올리면서 친근하게 반응해주시기도 하고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가 해온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요. 그런 순간순간이 누적되면서 제게 큰 의미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이 단체가 지금까지 온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그걸 느낄 때마다 고맙고, 저도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사진 6_ 김혜란 참여연대)
Q. 연대라는 말이 참여연대에도 있고, 연대회의에도 있고 하잖아요. 광장에서의 연대는 어떤 의미였나요?
(김혜란 활동가는 연대회의 국장을 맡고 있다) 너와 나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힘. “끈”이었어요. 내가 지칠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고, 또 누군가 지치면 내가 그 손을 내밀어주는. 그게 연대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말로 설명하기보단 체감하는 거죠. 함께 있어서 가능한 힘, 같이 있으니까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 광장에서 그걸 많이 느꼈어요.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광장’은 단지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가능성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도 시민의 목소리가 닿는 자리에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란다.
인터뷰어 : 박가현 (충북시민재단)
공익활동과 시민사회를 알아가고 있는 5년차 활동가. 동료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뉴스레터에 오늘&go(오늘엔지오)를 연재했다.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습니다. 12.3 계엄 이후, 꾸준히 광장을 만들고 참여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광장을 함께 만들어간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광장을 열기 위해 집회신고부터 무대설치, 공연 섭외, 발언자 선정, 참여자 안전, 홍보까지. 분야를 넘어 매주 거리에서 광장을 만들고, 지키고, 지원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로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 변화에 있어 시민사회 활동가의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획인터뷰 -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
손 내밀고 손 잡아주는 연대의 힘을 체감한 광장에서 123일
-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김혜란 활동가
12.3 계엄 이후 거리로 나온 시민들. 그들이 모일 수 있었던 곳엔 언제나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 중 하나였던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이하 참여연대) 활동가 김혜란님을 만나, ‘광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들어보았다.
Q.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직후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집에서 애들 재우고 있었어요. 평소처럼 조용한 밤이었는데, 단톡방에 "계엄"이라는 메시지가 올라왔죠. 처음에는 ‘가짜뉴스겠지' 했어요. 그런데 TV에 헬기가 국회에 착륙하는 장면이 나오고, 군인들이 유리창 깨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더라요. 이게 진짜라고? 이게 2024년이라고? 그날 밤 거의 뜬눈으로 새웠고, 머릿속은 복잡했어요. 참여연대는 다음날 새벽 6시에 사무실로 모이기로 했고, 바로 나갔죠.
아침에 준비하는데 아이가 묻더라고요. 아들이 그 당시 6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5.18을 배우고 있었거든요. 광주도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 기억이 있었나봐요. “엄마, 그거 전두환이 했던 거잖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죽는 거야?”라고 물었어요.
광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Q. 아이의 질문이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역사가 어떻게 현재로 소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네요. 지역에서는 어떻게 대응이 시작됐나요?
저희는 상황 발생 직후 바로 움직였어요. 오송 참사 이후 꾸려졌던 시민대책위가 작동하고 있었고, 참여연대도 그 안에 있었거든요. 이미 연결망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선전전 하자고 하니까 다들 바로 반응했어요. 그날 새벽에 피켓 만들고, 유인물도 인쇄하고, 성명서도 냈죠. 충북에서는 제일 먼저 계엄 관련 성명을 냈던 걸로 기억해요.
집회는 123일 동안 이어졌다. 탄핵 결정이 가까워지면서 매일 촛불을 들었다. 광장에서 유인물을 나누고 발언 순서를 짜는 일은 반복됐고, 리듬처럼 돌아갔다. 계엄 다음날 오전에 바로 집행위가 꾸려지고 공동집행위원장이 선정되었다. 홍보팀은 유인물과 현수막을, 언론팀은 성명서와 집회 일정 조율을, 조직팀은 집회 기획을 조정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2월 3일 계엄이 터지고, 4월 4일 파면될 때까지 123일. 우리는 단 하루도 광장을 비우지 않았어요.”
세대의 자리, 광장의 방향
Q. 광장을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한 학생이 “엄마가 맨날 촛불 들고 나가서 안 나가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서 같이 왔어요”라고 발언한 게 기억나요. 웃겼지만 찡했어요. 서울 집회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놀랐어요. 우리는 초를 들고 조용히 모이는데, 서울은 “삐딱하게”, “다만세” 같은 아이돌 노래가 나오고, 응원봉을 들고 있더라고요. 이 경험을 지역으로 가져와서 응원봉도 구매하고 분위기를 바꿨죠. 이 과정에서 광장의 주체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젊은 친구들 정치에 관심도 없고 참여 안하는 것 같고 그랬는데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눈으로 보니 감동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더라구요. 그리고 내가 물러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거구나 우리 선배들도 이 경험들을 다 하셨겠구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구나 싶었죠. 나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잖아요. 한 발짝 물러서는 세대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충북대 학생들의 참여는 그래서 더욱 빛났다.
“그 친구들은 학교 안에서 따로 조직도 꾸리고, 스스로 연대했어요. 그게 참 고맙고 대견했어요.”
지역의 광장을 지키는 사람들
Q. 참여연대 내부에서는 어떤 원칙을 갖고 있었나요?
간단했어요. "광장을 비우지 말자." 그게 다였죠. 평일이든 주말이든, 사람이 많든 적든, 분위기가 좋든 안 좋든 간에 우리는 매일 나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원도 줄고 광장 분위기가 침체되기도 했고, 서울 집회에 참석하고 싶기도 했지만, 저희는 지역 광장을 지키기로 했어요. 우리가 서울로 가버리면 지역의 광장은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으니까 지역의 광장을 지켜야된다는 생각이었어요.
Q. 삼보일배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그게 사실 저희가 사전에 기획한 게 아니라 이틀 전에 제안한 거였어요.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삼보일배라도 하자”고 제의했고, 그게 현실이 된 거예요. 어떻게 골라도 제일 힘든 삼보일배를 골랐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때도 진짜 고마웠었어요. 저희는 1시간이면 될 줄 알았거든요. 택도 없더라고요. 길고 힘들었지만 다들 말없이 해줬어요. 연세 많으신 대표님들도 선뜻 같이 걸으셨어요. 감동이었죠.
“그래, 이 힘으로 우리 또 가는 거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정치는 바뀌어야 한다, 시민이 바꿔야 한다
Q. 매일 광장을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진짜 힘들었어요. 저녁 집회 끝나면 집에 9시 넘어 들어가고, 아이들은 배달 음식에 질려 있고, 몸도 마음도 지치는 날이 많았죠.
Q. 광장을 운영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이번 집회 때 이야기했었던 게 “혐오, 차별을 배제하자” 였어요. 누구나 광장에서 발언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발언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상처받으면 안 된다는 요구가 있었는데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성별이 모이다보니 그게 어렵더라구요. 크게 마찰이 있지는 않았는데 군데군데에서 불편함이 나오는 거죠. 예를 들어 “윤석열 멧돼지 같은 놈” 이런 말요. 어떤 분에겐 분노의 표현이지만, 다른 분들은 불편해하죠. 그래서 자유발언 전에 부탁드렸어요. "표현은 자유지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해주세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다들 지켜주시더라구요.
Q.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게 있을까요?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좀 더 재미있게 할 수는 없었을까?”예요. 저희가 집회를 운영하면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겁다’, ‘어렵다’는 말이었거든요. 사실 이해돼요. 우리가 박근혜를 탄핵시켰을 때 다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구나’ 기대했잖아요. 근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고 나서도 우리가 기대했던 개혁이 전부 이루어진 건 아니었고, 오히려 후퇴한 부분도 많았죠. 그게 되게 뼈아픈 교훈이었어요. 그래서 윤석열 파면도 단순히 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됐어요. 그런 문제의식을 담으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집회 내용도 무거워지고, 의제 중심으로 흘러간 것 같아요.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냥 “윤석열 내려와” 이 얘기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는데, 와보면 어려운 얘기 나오고 무거운 분위기고, 그러니까 거리감이 생긴 거죠.
서울은 자유발언이 되게 열려 있었고, 거기서 차별 철폐나 성소수자 권리 같은 얘기도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파면 이후 사회에 대해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대요. 우리 지역에서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담지 못했던 게 좀 아쉬워요. 참여한 시민들도 보면, 젊은 세대는 다 서울로 갔더라고요. “우리 딸은 서울 촛불 갔어요” 이런 말들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에서도 지역의 동력이 빠져나간 느낌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도 다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람을 참여시키는 건 늘 어렵죠. 이건 활동하면서도 계속 느끼는 부분이에요. SNS도 지역에서는 활용에 한계가 있죠. 커뮤니티 기반도 약하고. 그렇다고 기존 방식만 고수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더 많이 고민이 남았던 것 같아요. 집회가 끝난 뒤에 ‘우리가 목소리는 냈는데, 다음을 준비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했나?’라는 질문도 계속 들고요. 다음에는 그 간격을 줄이는 걸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4_ 김혜란 시국선언)
시민사회는 아직 유효하다
Q. 앞으로 시민사회가 만들어갈 광장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시나요?
요즘 “시민사회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 “시민단체가 꼭 필요하냐?”는 질문을 많이 듣죠.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활동가들이 정당 활동이나 정치 영역으로 가기도 해요. 제도나 법을 바꾸는 건 결국 국회, 의회가 하는 거고, 실제 조례나 정책도 정치권이 주도하니까요. 그러다 보면 ‘그럼 시민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이 생겨요.
그런데 이번 광장 경험을 통해 다시 확신했어요. 여전히 정치권이나 행정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그게 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걸요. 제도나 정책을 만들기 전에 문제를 발굴하고, 공론화하고, 목소리를 모으는 일. 그건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직도 우리 활동은 유효하다는 걸 느꼈어요.
다만 숙제는 있어요. 시민들과의 소통을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전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그럼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죠. 젊은 청년들과의 소통도 중요하고, 반대로 실버 세대가 많아지는 흐름도 무시할 수 없어요. 함께할 수 있는 의제와 방식이 뭘까, 그걸 찾아야 해요.
다음 광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누구와, 어떤 말로, 어떤 방식으로. 그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가져가야 할 숙제예요.
Q. 100명을 광장에 부를 수 있다면 누구를 부르고 싶으세요?
제일 힘든 사람들과, 제일 결정권 있는 사람들. 같이 앉아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어요. 누구는 일자리를 잃었는데, 누군가는 밤마다 축제를 열고 있어요. 이건 너무 불균형하잖아요. 도청에 오송 참사 추모 표지석 하나 세우는 데도 여론조사 먼저 한다더라고요. 왜 그런 거에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자리에서 말이라도 듣는 시간, 꼭 필요해요.
참여연대 활동가로 산다는 것
(사진 5_ 김혜란 민우회)
Q. 참여연대 활동은 얼마나 되셨고,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지금 13년 차예요. 근데 여전히 막내예요. 저는 청주대학교 나왔고, 학생운동을 아주 찐하게 오래 했어요. 시민운동은 처음엔 충북여성민우회라는 여성단체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단체가 내부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다음 걸음을 고민하게 됐죠.
시민운동은 계속하고 싶은데 노조는 제 체질엔 안 맞을 것 같고, 그러던 차에 주변에서 참여연대를 추천해줬어요. 사실 충북에 있는 대부분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거든요. 그 인연 덕에 자연스럽게 참여연대로 오게 됐어요.
그리고 여기서 제 남편도 만났어요. 결혼할 때 얘기도 재밌어요. 신랑을 소개해준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거든요. 시민사회 선배들이 다 각자 따로 소개해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같은 사람이었어요. 지역 시민사회 전체가 우리 연애를 밀어준 느낌이었죠. 결혼할 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어요. 저희 시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뵌 적은 없는데, 지역 어른들이 정말 많이 축하해주셨어요. (*시아버님은 상생과 연대의 시민운동 정신을 실천하신 故최병준 선생님이다.)
Q. 참여연대 활동 중에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참여연대에 들어와서 제일 좋았던 순간이 이 단체가 진짜 ‘회원의 힘’으로 굴러가는 걸 눈으로 확인했을 때예요. 그걸 느낄 때마다 ‘내가 이래서 여기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참여연대가 갑작스럽게 공간을 옮겨야 했는데 돈이 없었거든요. 그때 회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사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바로 도와주셨고, 그 덕분에 우리가 이사할 수 있었어요.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회원들에게 이야기하면,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세요. 그럴 때마다 이 단체의 내공이 얼마나 단단한지 실감해요.
어디 가서 “저 참여연대에서 일합니다” 하면, “아, 참여연대! 알죠”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강태재’, ‘송재봉’처럼 참여연대와 연결된 이름들을 떠올리면서 친근하게 반응해주시기도 하고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가 해온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요. 그런 순간순간이 누적되면서 제게 큰 의미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이 단체가 지금까지 온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그걸 느낄 때마다 고맙고, 저도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Q. 연대라는 말이 참여연대에도 있고, 연대회의에도 있고 하잖아요. 광장에서의 연대는 어떤 의미였나요?
(김혜란 활동가는 연대회의 국장을 맡고 있다) 너와 나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힘. “끈”이었어요. 내가 지칠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고, 또 누군가 지치면 내가 그 손을 내밀어주는. 그게 연대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말로 설명하기보단 체감하는 거죠. 함께 있어서 가능한 힘, 같이 있으니까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 광장에서 그걸 많이 느꼈어요.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광장’은 단지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가능성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도 시민의 목소리가 닿는 자리에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