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만사X지리산][산내人터뷰] 타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법 - 김수정


언젠가 ‘아름다움’의 어원이 ‘나다움’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다운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 수정 씨가 말하는 예술 역시 그랬다. 그는 “예술은 돈을 더 벌거나 더 잘 살거나 누구에게 잘 보이는 데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부터 원하는 것, 나를 나답게 하는 무언가를 사회와 연결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예술의 깊이는 “나의 기쁨을 디테일하게 건드리는 데에서 온다”고도 했다. 그러니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예술, 아름다운 문학이란 삶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해야 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성을, 엄마를, 유색인종을, 시간 강사를 아름답다 여기지 않았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그리하여 아름다울 수 있도록 허용된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 씨는 스스로 ‘아름다운 예술’을 하기로 했다. 야만적인 세상이 요구하는 것 말고 내면에서 원하는 것을 말과 글로, 행동으로 뱉었다. 그러니 어디를 가나 튀지 말라고 지적받았고,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으라고 핀잔을 들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멜로를 써도 그로테스크가 됐다.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울 일인가. 세상의 ‘평범함’을 견딜 수 없었던 김수정의 아름다움은 어느새 저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올해 수정 씨가 진행한 품안도서관의 '영화와 문학' 강의는 정규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이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앞에서 두번째 줄,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수정 씨다. (사진 정혜지)




작가 김수정


처음엔 스스로 활자 중독이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이 없으면 전화번호부를 읽고 그것도 없으면 달력이라도 읽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예부에 들어가게 되면서 백일장에서 상을 휩쓸어오는 친구를 만났고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까지 경쟁하듯 책을 읽었다. 그러자 문학에 눈이 트였다. 문학은 세상을, 사랑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빚어낸 정수라고 생각했다. 서점에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글이 많나 한탄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글을 읽고 썼다. 


그런데 산내로 이주한 이후엔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자극도 많고 다른 작가들을 만나기만 해도 큰 자극이 되는데 시골은 그에 비하면 지극히 단순했다. 그러나 평화로움과 무해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수정 씨는 그간 가졌던 책과 문학에 대한 우상화가 오만이자 편견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두고 ‘그냥’ 쓰려고 한다. 옆집 숙자 언니의 이야기, 가벼운 오늘 하루 일상, 그것도 아니면 ‘뭐 쓰지?’라는 단어로 빈 화면을 가득 채우기라도. 욕심내지 않고 죽기 전에 장편소설 한 권, 단편소설집 한 권 정도 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평생 글 쓰는 엄마를 지켜본 아들은 말한다. “난 엄마가 엄마답게 사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해. 그래야 김수정의 문학이 나오는 것 같아.” 






야만의 시대


‘저항’이라는 단어는 수정 씨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쩌면 하나의 계기가 된 키워드였다. 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니던 세대라면 다 아는 상황들, 특히 ‘운동’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저항하는 시인을 꿈꿨던 수정 씨는 문예창작과로 진학했지만, 그 당시 시인의 사회적 평판은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이었다. 스스로 굶어 죽는 직업을 선택할 순 없어 고민 끝에 문창과에서 떠오르던 최고의 직업, 카피라이터가 되기로 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기획사에 입사하지만, 카피라이터의 삶은 입사 전 수정 씨가 꿈꾸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제일기획은 워낙 사람도 많고, 삼성과는 또 다른 사풍 같은 게 있었어요. 제일 웃겼던 게 매일 아침 사내 방송 아나운서가 모니터에 나와서 ‘안녕하세요, 제일기획 방송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를 위해 가볍게 운동할까요?’ 하면서 아침마다 체조하고 그랬어요. 옛 시대의 잔재처럼.” 


그보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여자 고졸 사원’이었다. 그들은 ‘여직원 휴게소’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에서 지냈다. 여직원 휴게소는 ‘정규직 여사원’은 갈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유니폼을 입고서 구두를 닦고, 커피를 타고, 담배 심부름을 하는, 그러나 사무실의 살림을 다 꿰고 있던 동갑내기의 고연차 고졸 여성들이 있었다. 


“저는 자유복을 입고 그분들은 유니폼을 입었어요. 어떤 한 분은 저랑 동갑인데 입사 7년 차인 데다 모르는 게 없어요. 정말 야무졌어요. 자료를 부탁하면 1분도 안 걸려서 착착 찾아오고 바쁠 때는 타자기도 척척 쳐서 주고. 정말 사무실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월급이 제가 받는 3분의 1밖에 안 돼요. 그리고 회식에도 참석을 못 해요. 그게 너무 짠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나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월급이 반도 안 되는 건 너무 슬프죠. 그걸 보고 회사에 큰 분노를 느꼈어요.”


수정 씨는 그 길로 팀장에게로 가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유니폼이라도 없애달라고 따졌지만 ‘오지랖이 넓다’, ‘1년도 안 된 새끼가 그런 것부터 보이냐’는 말만 듣고서 돌아왔다. 오히려 치마를 입으라고 강요당하기도 했다. 광고주 미팅 때는 술자리에서 광고주 옆에 앉아 술을 따라 드리라는 압박을 받았다. 수정 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광고 회사라 자랑하는 곳에 카피라이팅 일을 하러 왔으나 정작 카피라이팅은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회사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딱 1년이었다. 담배 연기 가득한 사무실과 보란 듯한 차별이 난무하던 야만의 시대였다.




미국 유학 시절의 수정 씨



다른 세상에도 차별은 있다


수정 씨는 시만큼이나 영화를 좋아했다. 퇴사를 하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에는 번역되어 들어오지도 않는 영화들이 미국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학비를 알아보니 1년만 지내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지만, 당시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께 투자를 해달라고 설득해 미국으로 떠났다. 우수한 대학 성적과 직장 경력 덕에 비교적 쉽게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잘 다가가는 성격 덕에 언어 실력도 빠르게 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차별이 미국에는 있었다.


“친구들과 애틀랜틱시티의 카지노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카지노에 가기 전에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입구에 ‘개와 유색인종은 출입 금지(DOGS AND COLORED DO NOT ENTER)’라고 적혀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저는 칼라드(colored) 잖아요. 학교 주변에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우리는 안 되겠다 싶어서 딴 데를 갔죠. 좀 허름한 식당으로 가서 밥 먹기 전에 손 씻으려고 갔는데 거기도 ‘COLORED’ 세면대가 따로 있는 걸 보고 완전 충격을 받았어요. 미국 사회에서 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겠더라고요. 한국 회사 생활에서는 고졸 여사원을 연민을 갖고 바라봤는데 미국에서 내가 “baby”나 “kid”라고 불리는 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죠. 제가 단순히 키가 작은 편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던 거예요. 만약 제가 학생이 아닌 노동자로 미국에 갔다면 전혀 다른 경험을 했을 거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그때가 1992년이었어요.”




대학원의 민낯


아버지 사업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다 나를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일인 것 같아 수정 씨는 부담감을 안고 1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왔다. 들어와서는 대치동과 강남에서 입시 학원 강사와 과외를 시작했고, 가르쳤던 학생들이 좋은 성과를 내며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다. 수업이 성행하며 돈은 더 잘 벌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사교육과 대학 서열화 때문에 이 나라가 엉망진창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한복판에서 내가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사교육이라는 블루오션에서 떨어진 파이를 뜯어먹는 공생관계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이가 5살이 될 무렵, 대학원으로 가서 새로운 길을 찾고 싶었다. 영화와 문학에 대한 열정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였다.


과거의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창작 아닌 평론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신상웅 교수에 대한 이야길 듣는다. 신상웅 교수는 문창과의 필수 과목인 소설 창작 수업의 교수였는데, 학생들이 쓴 작품을 미리 받아 꼼꼼히 읽고서는 합평시간에 들어오자마자 원고를 찢거나 날리거나 휴지통에 넣으며 “오늘 수업 끝.” 하고 나가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소설이 있으면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을 빨간 펜으로 꼼꼼히 지적한 원고가 돌아왔다. 수정 씨는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쓴 소설을 제출했다.


“첫 소설 이름도 기억해요. <피아노>. 원래 원고지 80매에서 100매 분량이 돼야 하는데 제출일 직전까지 원고를 쓰다가 65매 정도로 완결을 내고 어찌어찌 제출했어요. 그러고선 수업 시간에 나 이제 죽었다 하고 있는데 이 선생님이 제 원고를 갖고 와서 “야, 김수정 니 소설 썼었나” 하시면서 “너 앞으로 소설 써.” 이러시는 거예요. 너무 기뻤죠. 제가 간혹 친구들한테 그래요. 나를 기르신 어머니는 신상웅 선생님이라고. 이분이 없었으면 저는 아마 이 가난한 문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겠죠. 그 선생님의 이쁨을 받고 제가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자신감에 찬 원고들을 써 내려갈 무렵, 학교에 커다란 사건이 하나 터졌다. 같은 과 교수의 성폭력 사건이었고, 수많은 피해자 중 한 명이 수정 씨였다. 해당 교수는 남학생들에게는 금거북이를 받고, 여학생들에게는 성폭력을 저질렀다. 수정 씨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을 때 알고 지내던 문학 평론가도, 존경하는 시인도 수정 씨의 편은 없었다. 괜히 건드리면 너만 다친다고, 그 교수 총장과도 아는 사이라고, 괜히 이야기해서 문창과를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 했다. 학교를 창피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결국 당사자들이 나서야 했다. 그들이 직접 싸운 끝에 가해 교수는 법적으로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을 받았으나, 피해자들이 연대해 학교 측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를 학교에서 강제 해임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석사 과정이 끝난 수정 씨에게는 박사 과정까지 이어갈 힘이나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릴 적의 용준 씨(아들)와 수정 씨 



8천만 원짜리 정교수


수정 씨는 대학원에서 커다란 사건을 겪고서 선배의 소개로 대학교 강사로 취직한다. 폐강 위기에 있던 <영상 문학의 이해>라는 과목을 받았다. 수정 씨는 과목 이름을 <영화와 문학>으로 바꾸고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서로 떠들게 하는 수업으로 포맷도 변경했다. 처음엔 말을 한마디도 못 꺼내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 마디씩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예쁘게 보였다.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 수정 씨가 과목을 맡은 이후로 폐강 위기에 내몰렸던 수업은 대강당에서 200명의 학생이 수강하는 인기 과목이 됐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3년이 수정 씨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자 가르치는 일에 대한 애정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열다섯 편의 소설도 써낼 만큼 상태가 좋았다. 한 통화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날 밤에 A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지금 좀 나와보라고. 어디를요? 하니 자기가 학과장이랑 같이 있는데 나를 소개시켜주고 싶대요. 자기가 나 이뻐하는 거 알지 않냐고. 술 접대하라는 거잖아요. 와서 술 따라주고 계산도 좀 하고. 언제까지 그렇게 시간 강사만 할 거야? 하면서요. 저는 늦은 시간에 아이 엄마에게 선약도 없이 전화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얼마 후, 두 번째 연락에서 A 교수는 둘이서 술 한잔 하자며 약속을 잡고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8천만 원만 내면 정교수를 시켜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수정 씨는 순간적으로 그 말에 솔깃했다. 정교수가 되면 직장도 안정적이고 예뻐하는 학생들을 평생 가르칠 수 있었다. 그 시절 그의 꿈은 어디 조용한 시골 대학에서라도 문창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빚을 내서라도 돈을 마련할까…. 하지만 그는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스스로 되뇌었다. ‘김수정 너도 썩어빠졌구나.’ 잠깐이라도 솔깃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수정 씨는 며칠 뒤 빈손으로 A 교수의 방을 찾아갔다. “정교수가 8천만 원을 채워야만 성립되는 자격이라면 제가 자격이 없다는 뜻이고, 자격 없는 사람이라면 수업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은 이번 학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어라고 구시렁거리는 방 주인을 두고 수정 씨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강아지와 함께 매일 같은 산책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 나누는 것이 수정 씨의 일과다.



내가 원하는 삶으로


2014년은 수정 씨에게도 극복하기 어려운 한 해였다. TV에서 세월호 사건 경과만 보고 있던 수정 씨에게 남편은 말했다. “이제 좀 그만하지?” 정이라는 것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간 쌓여 온 이유들은 많았으나 헤어짐을 선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결국 그해 가을에 이혼을 했다. 이후 수정 씨는 1년이 넘도록 우울을 겪다가 광화문에서 지금까지 함께하는 사람을 만났다. 다른 것보다 분노 포인트가 비슷한 점이 좋았다. 실상사 귀농학교 초창기 멤버였던 그는 항상 수정 씨에게 “살래(산내) 가자”는 말을 했다. 평생 스스로를 ‘도시 사람’으로 정의하며, 산내면에 놀러만 가던 수정 씨는 자신이 생각했던 시골과 다른 이곳의 모습을 보고 아들의 동의를 구해 산내면으로 이주했다. 2017년 3월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우디 앨런이라는 영화감독이 자기는 뉴요커로서의 삶이 되게 좋다고 말했어요. 뉴욕은 어디를 가나 큰 영화관과 서점이 있고 맛있는 커피숍도 있잖아요. 저도 도시에서 쭉 자라다 보니 그 생활이 되게 익숙했거든요. 도시에 지쳤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시골에 간다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근데 여기 와 보니 시골 사람들은 그런 거 없이도 잘 살더라고요. ‘오늘 커피 먹었나? 안 먹었으면 우리 집 가서 커피 한잔해라’ 하면서 믹스커피 봉지째로 주시는데 그런 재미도 있었어요. 지금도 제가 시골사람 같진 않아요. 여전히 놀러 온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아마 여기서 죽겠죠?”


이주 초반엔 글쓰기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북 연주 동아리 ‘북치고살래’ 활동을 시작했고, 작은학교 글쓰기 수업 선생님을 맡게 됐다. 실상사 작은학교는 졸업생 모두가 졸업식에서 자서전을 발표하는데, 학생들이 그 글을 쓰는 데 도움을 달라는 이웃 주민의 부탁이었다. 


“작은학교 수업을 하면서 사교육에 종사했던 때를 죄 갚음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순정한 기쁨을 다시 한번 느꼈어요. 이 수업이 저에게 적절한 수입은 안 될지 몰라도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감동한 적도 많고요. 수업 때는 아이들의 재능이 한눈에 보일 때도 있어요. 수업할 때는 그냥 떠오르는 기억들을 다 써보라고 이야기해요. 초고는 어차피 쓰레기니까. 그날의 글감을 알려주고 별도로 글쓰기에 더 관심이 있는 학생에게는 따로 면담을 해요.”


수정 씨의 글로 연결된 마을 이웃 덕분에, 시골에 와서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르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성인을 앞둔 졸업생들에게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가야 할 방향을 정립하는 과정에 함께하는 일은 수정 씨에게 매일 하는 강아지와의 산책만큼이나 소중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대학생들의 말문을 트이게 했던 그 강의와 같은 이름, '영화와 문학' 강의로 산내 이웃들을 만난다. (사진 정혜지)




외국인 노동자를 보다, 소설 <삵>


수정 씨는 2012년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삵>이라는 소설로 등단했다. 소설은 한 남자의 실종과 함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어느 가죽공장의 풍경으로 시작하는데, 수정 씨가 일산의 가구공단 근처에서 지낼 때의 풍경을 소설에 입힌 것이다. 그때 그가 보고 겪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주노동자들에게 내뱉는 반말, 공중전화 박스 안 이주노동자의 어딘가 쓸쓸한 표정, 외국인 아저씨의 품에 가려는 아이의 손을 확 잡아채는 한국인 양육자, 공단 안의 폐기물처리장과 가죽공장에서 퍼지는 지독한 악취였다. 


“이거 어떡하지, 너무 괴로운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외국인 노동자가 지금 250만 명이 넘었대요. 한국 인구의 5%예요. 이주노동자들은 가능하면 돈을 안 쓰고 아끼고 아껴서 고국에 보내야 하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니까 무릎이 저절로 턱 꿇어지는 거죠. 인간이 살아간다는 게 도대체 뭔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소설만 이야기하면 아파요.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라도 지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사실 저는 이걸로 등단할 줄 몰랐어요. 너무 아픈 이야기라서, 다시 보는 게 괴로워서 잘 다듬지를 못했어. 그러니까 이제는 어떤 마인드를 갖추고 이분들을 만나야 하는지 일찍부터 교육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소설 <삵>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기술보다는 견디는 힘만이 필요한 일이었다.’ 수정 씨는 ‘유색 인종’으로, ‘여성’으로, ‘시간 강사’로 살아내며 어떤 사람들만 누릴 수 있었던 ‘주류’ 문화에서 배제되었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은 계급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견디는 힘은 저항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소수자에 대한 연대로 이어졌다. 그의 삶으로 보자면 카피라이터와 고졸 여직원 사이가, 한국인으로서 이주 노동자를 보는 마음이, 씻는 곳도, 방도, 부엌도 없이 여인숙 같은 건물에서 커튼을 덮고 자는 친구의 가난이 그랬다. 수정 씨는 그들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나누기로 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그게 숙제예요. 저는 문학이나 영화가 하는 일이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소설을 통해서 문제 제기까지는 했죠.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이제 어떡하지? 이 시골에도 이주노동자들이 엄청 많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답은 못 찾았어요. 그냥 여기에선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걸려고 노력해요.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십니다.”






진행 /누리
글 / 승현
사진 제공 / 김수정

2024년 8월 23일 인터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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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승현

지리산 귀촌인 인터뷰집 <어디에나 우리가> 저자. 세상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으로 살아간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임팩트 그라운드'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가 후원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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