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에서 고립·은둔 청년이 54만 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때 유행했던 ‘히키코모리’라거나 ‘초식남/녀’와는 용법이 다르다. 이전의 개념이 일부 비주류를 일컬었다면, ‘고립·은둔 청년’은 이 시대 청년의 대부분이 그러한 경험을 하고 있거나 했었다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삶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살피는 지표로 봐야 한다.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사회적 안전망에서 동떨어진 이들이기도 하다.
‘지식순환사회적협동조합(이하 지순협)’은 고립·은둔 청년을 지원하는 ‘존재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두두는 지순협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첫 기획부터 자잘한 운영 업무까지, 직접 발로 뛴다. 청년들의 존재를 부정적이거나 위축시키지 않고, 부족했던 사회적 지지기반을 함께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다.
#. 생협에서 여성 리더십을, 대안대학에서 삶의 지침을 배우다
Q. 우선은 어떻게 지순협에 오게 되셨는지부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2015년에 지순협에서 대안대학 1기를 모집했어요. 바로 지원했죠. 운명이라고 느껴졌어요. 나처럼 이렇게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안 뽑을 수는 없을 거다, 이런 자신감으로 면접을 봤어요. 학습 공동체를 굉장히 바라고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수능 날, 수능 거부 시위를 기획해서 했었어요. 사실 저는 입시를 거부한 거였거든요. 그런데 입시를 거부하고 나니 대학에 갈 수 없잖아요. 대학은 강의를 듣는 곳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고, 마음에 맞는 선배나 교수를 통해 에너지를 받는 과정이기도 할 거잖아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감을 잡거나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요. 입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거부했더니 그 모든 자원이나 네트워크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혼자 있게 되는 거예요.
대안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4~5년 정도 일을 했어요. 일하며 배우는 게 많기는 했지만, 막상 대학을 안 가니까 또래를 만날 일이 적었죠. 20대는 아예 없었고 저의 바로 위인 사수가 30대 중반이었거든요. 또래의 고민을 나눌 사람도,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배워나갈 사람도 없어서 답답했어요. 그래서 ‘탈대학네트워크’라는 곳을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고요.
대안교육 교육활동사진 (야외수업)
Q. 탈대학네트워크라니, 그때도 서로의 존재를 잘 들여다보는 조직을 만드셨었네요. 입시를 거부한 뒤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부천 아이쿱생협에서 일을 했어요. 되게 좋은 선배들을 만났죠. 제가 일하던 사무국의 사무국장님이 ‘부천여성의전화’에서 사무국장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사무국장님에게 20대 남자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으셨던 걸까요? (웃음) 퇴근하면 같이 손잡고 여성의전화 사무실에 놀러 갔어요.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지음) 세미나를 했죠. 그때가 저에게 첫 지적 충격이 있었던 시기였어요.
페미니즘 공부한 것도 그렇고, 여성의 리더십으로 굴러가는 조직을 경험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사무국장 위치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한 번씩 그 당시를 떠올려봐요. 그때 사무국장님은 어떻게 했었지, 하고요.
Q. 20대 초반 남성이 여성들의 공동체에서 여성 리더십을 배우셨군요. 정말 흔치 않은 경험인 것 같아요. 대안대학에 들어가 보시니까 어떠셨어요?
막상 들어가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수업만 열심히 들었어요. 열린 수업은 다 들었죠. 과제도 열심히 해가고요. 졸업하는 해에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6개월 전부터는 매일 10시간씩 책을 읽고 쓰고 했어요. 그러다가 한두 달 남기고는 그런 시간이 12시간이 됐다가, 14시간이 됐죠. 원 없이 공부하는 시간이었어요.
졸업논문으로는 칸트의 이야기가 삶에, 그리고 사회운동에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 썼어요. 미적 교육과 윤리적인 교육이 분리될 수 없고, 사회운동이 너무 교조적이지 않아야 된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 (웃음)
그 후로 칸트를 좋아하게 됐어요. 군대에 가서 칸트 책을 거의 다 읽었죠. 칸트에게서 삶의 지침을 얻었다고 하면 좀 웃기는 것 같기는 한데요. 여전히 공부를 하면서 활동을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요.
#.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들기
대안대학 졸업 후 만든 단체 '삼색불광파'의 포럼 발제 '독립작업자의 저항
Q. 공부와 활동이 함께 가야 한다는 건 어떤 뜻이에요?
사실 대안대학을 졸업하고 공부에 전념하는 게 더 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어요. 공부가 적성에 너무 잘 맞는 것 같더라고요. 앉아서 생각하고 읽고 쓰는 건 하루에 10시간을 해도 그렇게 피곤하지가 않았어요. 체력적으로는 조금 지쳤지만, 기분이 좋아지니까 제가 소모되는 일은 아니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살고 싶은 방향이나 되고 싶은 모습은 공부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지식도 생기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쌓여온 지식이나 개념은 현상들을 종합하면서 만들어졌고요. 공부의 출발은 활동에 있기도 한 거죠. 그래서 활동도 계속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활동을 하면서 공부를 해나가자, 하고요. 실제로 활동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지순협에서 ‘삼색불광파’라는 조직을 만든 것도 그래서였어요. 대안대학 졸업생들로 구성해서 공부한 걸 서로 읽어주고, 글을 완성하고, 저널에 실었죠.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꾸리고 싶은 사회를 같이 만들어가 보자, 서로가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줘 보자, 하면서요. 저 스스로는 수능 거부 시위를 했을 때부터 계속 관통하는 맥락이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Q. 어떤 맥락이 수능 거부 이후 두두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고 느끼고, 또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커뮤니티 만드는 걸 바라며 살아왔어요. 사람들이 다양한 관계망이 있어야 자기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서 그런 게 없었잖아요. ‘일반적’이지 않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사회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관계망이요. 그래서 제 삶의 미션이 생긴 거예요. 그런 환경을 계속 만들고 싶고, 저도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성장해 나가고 싶어요.
존재클럽 커뮤니티 활동사진(보이스테라피 클럽)
Q. 처음 존재클럽을 열 때는 어떠셨어요?
시작하기 전에는 자기검열을 많이 했어요. 나는 당사자인가, 당사자가 아니어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요. 상대적인 거기지만 저는 공백 없이, 모범생처럼 열심히 살았거든요. 주변에서 응원도 많이 해주고, 저를 찾아주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히려 만나기 전이 더 낯설었더라고요. 실제로 만났을 때는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아마 ‘은둔고립청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랑 되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Q. 당사자들을 만나보니 어땠나요?
저는 고립청년들의 마음이 공감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일종의 동질감을 느껴요.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서 고립되어본 경험이 있고, 언제 또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을 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뭔가를 잘해보고 싶은데 뭘 해도 잘 안 될 것 같고,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 같고.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는 것도 비슷하죠.
그럼에도 제가 계속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수능 거부 시위를 주도적으로 하면서 일종의 성공 경험도 해보고, 일터에서 좋은 선배도 만났어요. 대안대학도 작은 조직이기는 했지만 기다려주는 선생님들도 있었고요. 그런 게 사실은 사람 깊은 곳의 자신감을 만들어주잖아요.
제가 그런 걸 얻으면서 자랐다면 여기에 오시는 분들은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때 자원이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자원이 존재클럽에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 취약한 존재가 아니라 취약한 상태
존재클럽 커뮤니티 활동사진(동료조력자 양성과정 수료식)
Q. ‘고립·은둔 청년’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각자 고립된 배경은 다 달라요. 상처가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계기가 있을 수도 있는데요. 지금은 뭘 해볼 힘이나 신뢰가 없는 상태의 사람들인 것 같아요.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이들에게 자원을 만들어주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겨난 사람들인 것 같아요.
Q. 그럼 은둔고립청년이 취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취약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오랫동안 쥐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죠. 사회의 지원은 많이 필요한데, 그게 취약성을 인증하고 증명하는 과정이 되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사실 복지사업에서 지원받으려면 내가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고립·은둔 기간이 길면, 지금은 나아졌다 하더라도 다시 고립생활로 돌아갈 수 있어요. 에너지가 떨어지거나 불안해질 수 있는데, 회복된 청년이거나 한번 지원을 받았다면 다시 지원 받기가 어려워지기도 하죠. 그런 건 좀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민간 영역에서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Q. 고립·은둔 청년을 지원하는 조직들이 생겨나고 있잖아요. 존재클럽에서 특별히 더 신경 쓰려고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하나는 낙인 효과가 안 생기게 하려는 것 같아요. 고립·은둔 청년이라는 말이 자기 삶을 설명해줘서 반가운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게 정체성으로 계속 있으면 단어 자체가 무력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존재클럽의 문화가 취약성을 잘 보듬어야겠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너는 취약한 존재야’라는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오고 싶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서 ‘존재클럽’으로 이름을 짓기도 했거든요. 실제로 ‘존재’라는 말 때문에 온 사람들도 꽤 있어요.
또 다른 하나는 다양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기는 한데요. 고립·은둔 청년 사업이라 너무 에너지가 없거나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조금 더 있는 사람도 있고 고립에서 회복된 사람도 남아있고 했으면 좋겠어요. 피어서포터(동료조력자) 사업을 계속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고립을 벗어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얘기해주는 것, 혹은 그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발표 사진(아르케 커뮤니티)
Q. 마지막으로 존재클럽이 어떤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잘 거쳐 갈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존재클럽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죠. 어느 정도 회복하고 에너지가 생기고 뭔가 해보겠다는 마음이 들면 각자에게 맞는 길을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전에는 이곳에서 같이 활동도 해보고, 어울려보고, 공부도 해보고 싶어요.
인터뷰어 : 고은
공부하는 인터뷰어.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20대를 꼬박 보냈다.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동양고전을 공부하며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배운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거기에 우리가 나눠야 할 무언가가, 우리를 연결시켜 줄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공동체와 동양고전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서 생산하보고자 30대는 인터뷰어로 살고 있다. 공부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동양고전 공부와 인터뷰 활동을 동시에 이어나가는 중이다. 동양철학 에세이 <어쩌다 유교걸>(2023),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2023)를 썼고, 인터뷰집 <불화와 연결>이 8월 출간 예정이다. <다른 이십대의 탄생>(2019)와 <낭송 사자소학>(2018)을 함께 썼다.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에서 고립·은둔 청년이 54만 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때 유행했던 ‘히키코모리’라거나 ‘초식남/녀’와는 용법이 다르다. 이전의 개념이 일부 비주류를 일컬었다면, ‘고립·은둔 청년’은 이 시대 청년의 대부분이 그러한 경험을 하고 있거나 했었다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삶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살피는 지표로 봐야 한다.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사회적 안전망에서 동떨어진 이들이기도 하다.
‘지식순환사회적협동조합(이하 지순협)’은 고립·은둔 청년을 지원하는 ‘존재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두두는 지순협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첫 기획부터 자잘한 운영 업무까지, 직접 발로 뛴다. 청년들의 존재를 부정적이거나 위축시키지 않고, 부족했던 사회적 지지기반을 함께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다.
#. 생협에서 여성 리더십을, 대안대학에서 삶의 지침을 배우다
Q. 우선은 어떻게 지순협에 오게 되셨는지부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2015년에 지순협에서 대안대학 1기를 모집했어요. 바로 지원했죠. 운명이라고 느껴졌어요. 나처럼 이렇게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안 뽑을 수는 없을 거다, 이런 자신감으로 면접을 봤어요. 학습 공동체를 굉장히 바라고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수능 날, 수능 거부 시위를 기획해서 했었어요. 사실 저는 입시를 거부한 거였거든요. 그런데 입시를 거부하고 나니 대학에 갈 수 없잖아요. 대학은 강의를 듣는 곳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고, 마음에 맞는 선배나 교수를 통해 에너지를 받는 과정이기도 할 거잖아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감을 잡거나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요. 입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거부했더니 그 모든 자원이나 네트워크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혼자 있게 되는 거예요.
대안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4~5년 정도 일을 했어요. 일하며 배우는 게 많기는 했지만, 막상 대학을 안 가니까 또래를 만날 일이 적었죠. 20대는 아예 없었고 저의 바로 위인 사수가 30대 중반이었거든요. 또래의 고민을 나눌 사람도,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배워나갈 사람도 없어서 답답했어요. 그래서 ‘탈대학네트워크’라는 곳을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고요.
대안교육 교육활동사진 (야외수업)
Q. 탈대학네트워크라니, 그때도 서로의 존재를 잘 들여다보는 조직을 만드셨었네요. 입시를 거부한 뒤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부천 아이쿱생협에서 일을 했어요. 되게 좋은 선배들을 만났죠. 제가 일하던 사무국의 사무국장님이 ‘부천여성의전화’에서 사무국장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사무국장님에게 20대 남자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으셨던 걸까요? (웃음) 퇴근하면 같이 손잡고 여성의전화 사무실에 놀러 갔어요.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지음) 세미나를 했죠. 그때가 저에게 첫 지적 충격이 있었던 시기였어요.
페미니즘 공부한 것도 그렇고, 여성의 리더십으로 굴러가는 조직을 경험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사무국장 위치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한 번씩 그 당시를 떠올려봐요. 그때 사무국장님은 어떻게 했었지, 하고요.
Q. 20대 초반 남성이 여성들의 공동체에서 여성 리더십을 배우셨군요. 정말 흔치 않은 경험인 것 같아요. 대안대학에 들어가 보시니까 어떠셨어요?
막상 들어가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수업만 열심히 들었어요. 열린 수업은 다 들었죠. 과제도 열심히 해가고요. 졸업하는 해에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6개월 전부터는 매일 10시간씩 책을 읽고 쓰고 했어요. 그러다가 한두 달 남기고는 그런 시간이 12시간이 됐다가, 14시간이 됐죠. 원 없이 공부하는 시간이었어요.
졸업논문으로는 칸트의 이야기가 삶에, 그리고 사회운동에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 썼어요. 미적 교육과 윤리적인 교육이 분리될 수 없고, 사회운동이 너무 교조적이지 않아야 된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 (웃음)
그 후로 칸트를 좋아하게 됐어요. 군대에 가서 칸트 책을 거의 다 읽었죠. 칸트에게서 삶의 지침을 얻었다고 하면 좀 웃기는 것 같기는 한데요. 여전히 공부를 하면서 활동을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요.
#.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들기
대안대학 졸업 후 만든 단체 '삼색불광파'의 포럼 발제 '독립작업자의 저항
Q. 공부와 활동이 함께 가야 한다는 건 어떤 뜻이에요?
사실 대안대학을 졸업하고 공부에 전념하는 게 더 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어요. 공부가 적성에 너무 잘 맞는 것 같더라고요. 앉아서 생각하고 읽고 쓰는 건 하루에 10시간을 해도 그렇게 피곤하지가 않았어요. 체력적으로는 조금 지쳤지만, 기분이 좋아지니까 제가 소모되는 일은 아니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살고 싶은 방향이나 되고 싶은 모습은 공부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지식도 생기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쌓여온 지식이나 개념은 현상들을 종합하면서 만들어졌고요. 공부의 출발은 활동에 있기도 한 거죠. 그래서 활동도 계속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활동을 하면서 공부를 해나가자, 하고요. 실제로 활동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지순협에서 ‘삼색불광파’라는 조직을 만든 것도 그래서였어요. 대안대학 졸업생들로 구성해서 공부한 걸 서로 읽어주고, 글을 완성하고, 저널에 실었죠.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꾸리고 싶은 사회를 같이 만들어가 보자, 서로가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줘 보자, 하면서요. 저 스스로는 수능 거부 시위를 했을 때부터 계속 관통하는 맥락이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Q. 어떤 맥락이 수능 거부 이후 두두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고 느끼고, 또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커뮤니티 만드는 걸 바라며 살아왔어요. 사람들이 다양한 관계망이 있어야 자기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서 그런 게 없었잖아요. ‘일반적’이지 않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사회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관계망이요. 그래서 제 삶의 미션이 생긴 거예요. 그런 환경을 계속 만들고 싶고, 저도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성장해 나가고 싶어요.
존재클럽 커뮤니티 활동사진(보이스테라피 클럽)
Q. 처음 존재클럽을 열 때는 어떠셨어요?
시작하기 전에는 자기검열을 많이 했어요. 나는 당사자인가, 당사자가 아니어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요. 상대적인 거기지만 저는 공백 없이, 모범생처럼 열심히 살았거든요. 주변에서 응원도 많이 해주고, 저를 찾아주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히려 만나기 전이 더 낯설었더라고요. 실제로 만났을 때는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아마 ‘은둔고립청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랑 되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Q. 당사자들을 만나보니 어땠나요?
저는 고립청년들의 마음이 공감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일종의 동질감을 느껴요.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서 고립되어본 경험이 있고, 언제 또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을 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뭔가를 잘해보고 싶은데 뭘 해도 잘 안 될 것 같고,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 같고.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는 것도 비슷하죠.
그럼에도 제가 계속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수능 거부 시위를 주도적으로 하면서 일종의 성공 경험도 해보고, 일터에서 좋은 선배도 만났어요. 대안대학도 작은 조직이기는 했지만 기다려주는 선생님들도 있었고요. 그런 게 사실은 사람 깊은 곳의 자신감을 만들어주잖아요.
제가 그런 걸 얻으면서 자랐다면 여기에 오시는 분들은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때 자원이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자원이 존재클럽에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 취약한 존재가 아니라 취약한 상태
존재클럽 커뮤니티 활동사진(동료조력자 양성과정 수료식)
Q. ‘고립·은둔 청년’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각자 고립된 배경은 다 달라요. 상처가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계기가 있을 수도 있는데요. 지금은 뭘 해볼 힘이나 신뢰가 없는 상태의 사람들인 것 같아요.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이들에게 자원을 만들어주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겨난 사람들인 것 같아요.
Q. 그럼 은둔고립청년이 취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취약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오랫동안 쥐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죠. 사회의 지원은 많이 필요한데, 그게 취약성을 인증하고 증명하는 과정이 되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사실 복지사업에서 지원받으려면 내가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고립·은둔 기간이 길면, 지금은 나아졌다 하더라도 다시 고립생활로 돌아갈 수 있어요. 에너지가 떨어지거나 불안해질 수 있는데, 회복된 청년이거나 한번 지원을 받았다면 다시 지원 받기가 어려워지기도 하죠. 그런 건 좀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민간 영역에서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Q. 고립·은둔 청년을 지원하는 조직들이 생겨나고 있잖아요. 존재클럽에서 특별히 더 신경 쓰려고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하나는 낙인 효과가 안 생기게 하려는 것 같아요. 고립·은둔 청년이라는 말이 자기 삶을 설명해줘서 반가운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게 정체성으로 계속 있으면 단어 자체가 무력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존재클럽의 문화가 취약성을 잘 보듬어야겠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너는 취약한 존재야’라는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오고 싶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서 ‘존재클럽’으로 이름을 짓기도 했거든요. 실제로 ‘존재’라는 말 때문에 온 사람들도 꽤 있어요.
또 다른 하나는 다양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기는 한데요. 고립·은둔 청년 사업이라 너무 에너지가 없거나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조금 더 있는 사람도 있고 고립에서 회복된 사람도 남아있고 했으면 좋겠어요. 피어서포터(동료조력자) 사업을 계속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고립을 벗어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얘기해주는 것, 혹은 그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발표 사진(아르케 커뮤니티)
Q. 마지막으로 존재클럽이 어떤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잘 거쳐 갈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존재클럽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죠. 어느 정도 회복하고 에너지가 생기고 뭔가 해보겠다는 마음이 들면 각자에게 맞는 길을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전에는 이곳에서 같이 활동도 해보고, 어울려보고, 공부도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