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선 성북주거복지센터 사회복지사/사진=정재훈
학업을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에 온 부산 소녀 지선. 하지만 기숙사는 꽉 차서 들어갈 수가 없었고, 깔끔해보이는 자취방이나 하숙집은 대학생 주머니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팍팍한 1인 가구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저렴한 보증금에 식사도 해결할 수 있어 덜컥 계약해버린 반지하 하숙집은 조금이라도 습한 날이면 어김없이 곰팡이가 폈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고 거주할 수 있었던 고시원은 ‘나는 관棺으로 퇴근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자는 것 외 다른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운 비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첫 전셋집이었던 투룸 빌라에선 다시 곰팡이에 대한 불안을 끼고 살아야 했다. 두통이 찾아왔고, 숨을 쉬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헤매던 대학생 지선은 ‘주거권’을 외치는 활동가가 됐다.
“먹으면 건강을 해치는 음식이 있듯이 살면 안되는, 위험한 집이 있어요. 반지하나 창문없는 고시원이 그런 공간이죠. 주거권은 시민들이 그런 집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권리에요. 인간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기도 하고요.”
15년 새 지선은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가 됐고,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인 시민들의 어려움을 듣고, 도움이 될만한 정책을 소개하며, 함께 대안을 고민한다.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야할 때에는 함께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몇해 전에는 보건대학원에 진학해 주거빈곤 청년 1인 가구의 건강문제와 대응전략에 관해 석사학위 논문도 썼다.
15년 동안 지선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선이 마주했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함께 이야기하고 활동을 전개하면서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었구나'는 걸 깨달아
2020년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 시절 동료들과 단체사진/출처=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열악한 주거환경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걸 자각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지선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주거분과 활동”이라고 답했다.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이하 서울청정넷)는 서울시 청년들(민)과 서울시청(관)의 민관거버넌스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서울청정넷은 정책의 수립과 시행, 평가 등 정책과정에서 청년의 의견수렴과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청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율적인 운영을 특징으로 한다. 2020년 기준 약 1,000명의 청년들이 각자의 다양한 문제를 이곳에 와서 이야기하고, 함께 대안을 마련했다. 이 중 주거분과는 주거 문제를 대한 관심을 넘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청년들이 모인 공간이다.
지선은 2019년 서울청년넷의 주거분과에 참여, 주거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겪어 온 청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곰팡이 핀 집과 한 평짜리 고시원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독립하여 살아가는, 또는 독립을 고민하는 청년 다수가 겪는 문제이며 동시에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냈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청년주거상담센터’와 ‘청년월세지원사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두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대안을 고민했던 프로젝트다. 각각 많은 청년들이 주거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주거 문제에 직면했을 때 상담을 받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문제의식과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청년들과 시민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사회 문제화하고 사회적으로 함께 풀어가는 과정에서 지선은 ‘주거권'을 조금 더 깊이있게 고민하게 됐다. 주거권이란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적절한 주거지 및 정주환경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시민에게는 권리가, 국가에게는 의무가 발생하는 셈이다.
2020년 6월 지선이 발표한 보건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서울시 주거빈곤 청년 1인 가구의 건강 문제와 대응 전략에 관한 질적 연구 : 당사자의 건강개념을 바탕으로)에는 지선의 이런 고민이 짙게 담겨있다. 지선은 해당 논문을 통해 “주거빈곤 청년가구의 건강 증진을 위해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했다.
“사실 주거권을 알게 됐다고 해서, 제 주거 환경이 드라마틱하게 더 좋아졌거나 법적으로 더 많은 권리를 보장 받게 된 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전입신고 같은 걸 할 때 조금 더 주의하게 된 건 있겠죠(웃음). 그보다는 ▲내가 경험했던 문제가 개인이 잘못 선택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구조적으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 ▲그래서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시민들이 겪는 어려움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같이 함께 고민하고 목소리를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것. ▲나아가 주거 뿐 아니라 시민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다양한 형태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생각해보게 된 것.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보다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그래야 바뀔 테니까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주거취약계층 주거상향지원 상담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김지선 사회복지사/출처=성북주거복지센터
‘김지선이 만든 작은 변화’를 주제로 질문을 시작하자, 지선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마이크를 건네준 것”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일 인상이 깊었던, 그래서 여전히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가치가 하나 있어요. 어떤 사람의 삶을 바꾸거나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 많은 고리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시작한 사람이 끝까지 맺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 바뀌지 않잖아요. 그래서 두번째 고리가 필요하고, 그 두번째 고리도 부족하면 세번째, 네번째. 나중에 100번째, 200번째 고리가 쭉쭉 이어지게 되죠. 그래서 저는 항상 제 다음 연결고리를 찾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요. 그게 제가 만든 아주 작은 변화 내지는 조그마한 기여 아닐까 싶어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청년월세지원사업’이다. 사업 첫해. 게스트하우스나 캡슐호텔 등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정책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코로나19 시기에 캡슐 호텔과 게스트하우스가 월세방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당국이 이를 인지하지 못해 정책의 사각지대가 발생한 것이다. 모르고 지나갈 수 있었던 빈틈을 메운 건 “보다 다양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던 지선의 제안 덕분이었다.
당시 서울청정넷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지선이 서울시가 주최한 정책간담회 자리에 당사자 청년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후에는 당사자와 함께 서울시 관계자 미팅에 참석. 정책의 사각지대가 존재함을 알리며 보완에 나섰다. 지선은 “엄청 거창한 변화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작게라도 기여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면서 “보다 많은 청년들이 정책의 수혜자로 포괄될 수 있어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생각도 든다. 문제 정의가 달라질 때 사회가 조금씩 변하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지선은 “다수의 시민들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문제 해결의 8할 정도 되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의제 설정 또는 이슈메이킹이라고 하죠? 우리 사회가 논의해야 할 또는 마주해야할 문제로 세팅하는 게 매우 어렵더라고요. 반대로 이게 되면 문제 해결의 8부 능선은 넘은 것 같아요. 선거를 치뤄야 하는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딱딱하기로 소문난 관료 조직 조차 ‘시민들이 이걸 문제로 인식하고 있구나’라고 느끼면 꽤나 빨리 움직이는 편이에요. 그렇게 공공의 자원이 투입되면 민간에서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들도 생기고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더 많은 시민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어요.”
#조금 특이했던 나의 번아웃 증상..오히려 활동에 집중하면서 극복해
전세사기 희생자 1주기 추모문화제에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김지선 사회복지사(맨 왼쪽)과 동료들/제공=김지선
평일 낮에는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청년활동을 전개하는 지선. 주거 문제가 법과 금융 등 복잡하고 어려운 이슈들과 맞물려 있는 탓에 또래 활동가들과 시간을 쪼개 공부모임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세종시에도 다녀왔다. 지선은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라는 단체를 통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다양한 청년들을 연결. 흩어져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이 밖에도 청년오픈플랫폼 Y(와이)에서는 청년 정책을 공부하고 있다.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지선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또는 ‘번아웃이 온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한 번 온 적이 있죠. 근데 그 때는 온 줄 몰랐어요(웃음). 어땠냐면 유튜브 숏츠 영상을 한 3시간씩 계속 보는 거예요. 요즘 많이들 보신다고 하는데, 저는 일이 많은 데도 그러고 있었어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해야 할 일에 집중을 못하고 계속 딴 일을 한 거죠.”
하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8년 보건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한 지선은 2019년 서울청정넷 활동을 시작하고 2020년에는 서울청정넷 공동운영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앞서 말했듯 더 많은 청년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찾아다니고 마이크를 쥐어줬으며, 내용을 정리해 시민들과 정부에 전달했다.
2021년에는 보건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석사학위 과정도 그랬지만 박사과정은 연구의 밀도가 높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많았다. 지선은 함께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폐가 되기 싫었다. 활동의 깊이와 넓이는 점점 깊어지고 넓어졌지만, 연구에 최대한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담았다.
“사실 활동과 연구. 둘 다 제가 좋아서 시작한 거거든요. 저는 번아웃이라는 게 좋아하는 일을 해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근데 심리상담을 전공하는 제 친구가 저를 보더니, ‘번아웃이라는 건 좋아하는 일을 하든, 싫어하는 일을 하든 에너지를 다 쏟으면 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방법은 간단했다. 에너지를 잘 관리하는 것.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지선은 자신이 조금 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활동과 연구. 두 가지도 모두 지선이 원했고 재밌어하며 동시에 애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선은 ‘활동’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어떤 일이 내가 더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일인가를 고민했어요.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저는 활동이더라고요. 당사자분들을 만났을 때를 예로 들어 볼게요. 보통 문제를 겪고 계신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해결책을 같이 고민하는 과정을 두고 일방적으로 에너지를 쏟는다고 보시는데, 저는 가끔 에너지를 얻기도 해요. 저도 조금 신기한데(웃음), 그럴 때 ‘연구도 물론 활동의 일환이지만, 나는 현장에서 당사자분들을 만나는 활동이 조금 더 맞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그렇게 지선은 2023년 3월. 성북주거복지센터에 주거취약계층 주거상향지원 상담사로 업무를 시작한다. ▲침수피해 반지하 주택 거주자 ▲쪽방, 고시원, 옥탑방 등 비주택거주자 ▲최저주거기준 미달 아동가구 ▲가정폭력 피해자 및 출산예정 미혼모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의 이주와 정착을 도와드리고 있다.
#활동의 매력이요? 일의 가치 = 제가 지향하는 가치
김지선 성북주거복지센터 사회복지사/사진=정재훈
그렇게까지 활동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실 지선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IT 회사에서 3년 가량 일을 한 적이 있다. 회사는 안정적이었으며, 보수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기준에서 보면 돈은 적고 안정성은 떨어지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활동이 지선에게 더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선에게 활동은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일의 가치가 제가 지향하는 가치와 일치한다는 점이 활동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 속에서 보장받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가 지향하는 가치이며 제가 바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에요. 말로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적 안전망으로 또는 사회보장시스템의 형태로 구체화되길 희망하고요. 조금 벅차지만, 평일 주간에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진행하는 주거상담이나, 주말과 저녁시간에 청년들과 모여 고민하고 제안하는 청년활동이 제게 즐겁고 힘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안전망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뿌듯함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힘들 때도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시민들에게 위로말고는 마땅히 해줄 게 없을 때나 청년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정치적인 활동으로 비춰질 때면 활동이 어렵기도 하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거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달라 조율하는 게 버거울 때도 있었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지치거나 포기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다. 버겁지만 아직까지는 나름의 자극제가 된다고. 무엇보다 지선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문제들을 마치 내 문제인냥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고 편하다.
“활동을 하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해 제 입장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당장 내가 경험한 문제가 아니었더라도요.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에는 전세사기나 플랫폼 노동, 기후위기 같은 문제들을 접하면 ‘아. 그렇구나’하는 정도였다면, 활동을 시작한 뒤로는 ‘여기에 대해 나는 어떤 입장이며 왜 그런 생각을 하지’라는 걸 계속 묻게 돼요. 이게 마치 내 문제인 것처럼요. 그 과정이 그리고 거기서 얻게 되는 에너지가 매우 좋아요. 그래서 나중에 설령 상근활동가로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또는 제가 어디에 있건, 저는 아마 계속 활동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 #청년 #청정넷 #청년정책네트워크 #주거권 #김지선
글쓴이_ 정재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제가 빚는 작은 노동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김지선 성북주거복지센터 사회복지사/사진=정재훈
학업을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에 온 부산 소녀 지선. 하지만 기숙사는 꽉 차서 들어갈 수가 없었고, 깔끔해보이는 자취방이나 하숙집은 대학생 주머니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팍팍한 1인 가구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저렴한 보증금에 식사도 해결할 수 있어 덜컥 계약해버린 반지하 하숙집은 조금이라도 습한 날이면 어김없이 곰팡이가 폈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고 거주할 수 있었던 고시원은 ‘나는 관棺으로 퇴근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자는 것 외 다른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운 비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첫 전셋집이었던 투룸 빌라에선 다시 곰팡이에 대한 불안을 끼고 살아야 했다. 두통이 찾아왔고, 숨을 쉬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헤매던 대학생 지선은 ‘주거권’을 외치는 활동가가 됐다.
15년 새 지선은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가 됐고,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인 시민들의 어려움을 듣고, 도움이 될만한 정책을 소개하며, 함께 대안을 고민한다.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야할 때에는 함께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몇해 전에는 보건대학원에 진학해 주거빈곤 청년 1인 가구의 건강문제와 대응전략에 관해 석사학위 논문도 썼다.
15년 동안 지선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선이 마주했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함께 이야기하고 활동을 전개하면서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었구나'는 걸 깨달아
2020년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 시절 동료들과 단체사진/출처=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열악한 주거환경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걸 자각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지선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주거분과 활동”이라고 답했다.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이하 서울청정넷)는 서울시 청년들(민)과 서울시청(관)의 민관거버넌스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서울청정넷은 정책의 수립과 시행, 평가 등 정책과정에서 청년의 의견수렴과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청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율적인 운영을 특징으로 한다. 2020년 기준 약 1,000명의 청년들이 각자의 다양한 문제를 이곳에 와서 이야기하고, 함께 대안을 마련했다. 이 중 주거분과는 주거 문제를 대한 관심을 넘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청년들이 모인 공간이다.
지선은 2019년 서울청년넷의 주거분과에 참여, 주거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겪어 온 청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곰팡이 핀 집과 한 평짜리 고시원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독립하여 살아가는, 또는 독립을 고민하는 청년 다수가 겪는 문제이며 동시에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냈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청년주거상담센터’와 ‘청년월세지원사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두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대안을 고민했던 프로젝트다. 각각 많은 청년들이 주거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주거 문제에 직면했을 때 상담을 받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문제의식과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청년들과 시민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사회 문제화하고 사회적으로 함께 풀어가는 과정에서 지선은 ‘주거권'을 조금 더 깊이있게 고민하게 됐다. 주거권이란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적절한 주거지 및 정주환경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시민에게는 권리가, 국가에게는 의무가 발생하는 셈이다.
2020년 6월 지선이 발표한 보건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서울시 주거빈곤 청년 1인 가구의 건강 문제와 대응 전략에 관한 질적 연구 : 당사자의 건강개념을 바탕으로)에는 지선의 이런 고민이 짙게 담겨있다. 지선은 해당 논문을 통해 “주거빈곤 청년가구의 건강 증진을 위해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했다.
#보다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그래야 바뀔 테니까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주거취약계층 주거상향지원 상담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김지선 사회복지사/출처=성북주거복지센터
‘김지선이 만든 작은 변화’를 주제로 질문을 시작하자, 지선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마이크를 건네준 것”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청년월세지원사업’이다. 사업 첫해. 게스트하우스나 캡슐호텔 등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정책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코로나19 시기에 캡슐 호텔과 게스트하우스가 월세방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당국이 이를 인지하지 못해 정책의 사각지대가 발생한 것이다. 모르고 지나갈 수 있었던 빈틈을 메운 건 “보다 다양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던 지선의 제안 덕분이었다.
당시 서울청정넷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지선이 서울시가 주최한 정책간담회 자리에 당사자 청년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후에는 당사자와 함께 서울시 관계자 미팅에 참석. 정책의 사각지대가 존재함을 알리며 보완에 나섰다. 지선은 “엄청 거창한 변화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작게라도 기여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면서 “보다 많은 청년들이 정책의 수혜자로 포괄될 수 있어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생각도 든다. 문제 정의가 달라질 때 사회가 조금씩 변하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지선은 “다수의 시민들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문제 해결의 8할 정도 되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금 특이했던 나의 번아웃 증상..오히려 활동에 집중하면서 극복해
전세사기 희생자 1주기 추모문화제에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김지선 사회복지사(맨 왼쪽)과 동료들/제공=김지선
평일 낮에는 성북주거복지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청년활동을 전개하는 지선. 주거 문제가 법과 금융 등 복잡하고 어려운 이슈들과 맞물려 있는 탓에 또래 활동가들과 시간을 쪼개 공부모임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세종시에도 다녀왔다. 지선은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라는 단체를 통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다양한 청년들을 연결. 흩어져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이 밖에도 청년오픈플랫폼 Y(와이)에서는 청년 정책을 공부하고 있다.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지선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또는 ‘번아웃이 온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하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8년 보건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한 지선은 2019년 서울청정넷 활동을 시작하고 2020년에는 서울청정넷 공동운영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앞서 말했듯 더 많은 청년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찾아다니고 마이크를 쥐어줬으며, 내용을 정리해 시민들과 정부에 전달했다.
2021년에는 보건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석사학위 과정도 그랬지만 박사과정은 연구의 밀도가 높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많았다. 지선은 함께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폐가 되기 싫었다. 활동의 깊이와 넓이는 점점 깊어지고 넓어졌지만, 연구에 최대한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담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에너지를 잘 관리하는 것.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지선은 자신이 조금 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활동과 연구. 두 가지도 모두 지선이 원했고 재밌어하며 동시에 애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선은 ‘활동’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지선은 2023년 3월. 성북주거복지센터에 주거취약계층 주거상향지원 상담사로 업무를 시작한다. ▲침수피해 반지하 주택 거주자 ▲쪽방, 고시원, 옥탑방 등 비주택거주자 ▲최저주거기준 미달 아동가구 ▲가정폭력 피해자 및 출산예정 미혼모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의 이주와 정착을 도와드리고 있다.
#활동의 매력이요? 일의 가치 = 제가 지향하는 가치
김지선 성북주거복지센터 사회복지사/사진=정재훈
그렇게까지 활동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실 지선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IT 회사에서 3년 가량 일을 한 적이 있다. 회사는 안정적이었으며, 보수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기준에서 보면 돈은 적고 안정성은 떨어지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활동이 지선에게 더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선에게 활동은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물론 힘들 때도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시민들에게 위로말고는 마땅히 해줄 게 없을 때나 청년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정치적인 활동으로 비춰질 때면 활동이 어렵기도 하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거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달라 조율하는 게 버거울 때도 있었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지치거나 포기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다. 버겁지만 아직까지는 나름의 자극제가 된다고. 무엇보다 지선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문제들을 마치 내 문제인냥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고 편하다.
#서울 #청년 #청정넷 #청년정책네트워크 #주거권 #김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