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변만사]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고 싶은 충북민언련 계희수

변화를만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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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한겨울이었다. 활동가 워크샵에서 만난 그녀는 자신이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부끄럽게 말했다. ‘되게 젊어 보이는데, 지역의 언론을 유지하고 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언론이 서울 중심부를 향해있는 것이 익숙한 한국에서 어떤 역할이 필요하다고 하여 청주에 머물기를 자처하는지 궁금해하는 한편,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환경에 놓여있다는 그녀를 응원하고 싶어 후원회원 가입했다.

그리고 2023년 7월 15일 오송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비교적 참사로 다뤄지지 않는 오송지하도참사의 1주기를 맞아 그녀는 언론인, 활동가 5명과 함께 기획부터 책이 발간되기까지 단3개월 만에 오송지하도참사 1주기 기록집 “715오송참사 그날의 기억, 1년 이야기 ‘나 지금 가고 있어’ 기록집”을 발간했다. 그 2개월 동안의 기억과 함께 지역 언론활동가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Q. 저희 관계가 친해서, 이런 자리는 또 어색하고도 오랜만이네요. 그럼에도 처음 계희수 활동가를 접하는 독자분들을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저도 약간 어색하네요. (웃음) 그날처럼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충북민언련)에서 활동하고 있는 계희수라고 해요. 단체에 소속되어 운동을 시작한지는 4년 차 쯤 된 것 같습니다. 충북 청주에 살면서 지역 언론을 견제하고,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근데 또 그것만은 아니고, 여러 가지 역할을...(웃음)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지역사회 이슈에도 열심히 결합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고요, 호기심 많은 초보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직업이 많죠?


Q. 그럼 충북 민언련의 활동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설명을 부탁드려요!

저희 충북민언련의 최근 주력 활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쓰고, 운영하는 미디어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몫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데 관심이 많아요. 지난 지방선거 때는 지역민들과 함께 <다른시선>이라는 매체를 만들어 두 달간 운영했고요,

매년 청주여성시민매거진 <떼다>도 발행하고 있어요. 주로 노조나 사회운동가들, 청년들과 결합해요. 저는 대개 편집장 역할을 맡아서(주로 일을 벌리는 걸 좋아해서), 기성언론이 놓친 혹은 외면한 의제와 사람들을 중심으로 아이템을 선별하고 글을 쓰고, 참여자들의 글을 다듬어요. 역할도 여러 가지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형태죠?

또, 지역언론의 기존 역할인 기성의 지역언론들을 감시하고 협력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언론인들은 언론운동을 함께 하는 주요 주체이자 감시의 대상이기도 해요. 지역언론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활동에는 언론인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지역언론을 비판해야 할 때는 서로 경계하기도 합니다.



Q. 이건 제가 원래부터도 늘 궁금해왔지만, 여태 묻지 않은 질문이기도 해요.태생부터 서울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원래부터 지역언론에 관심이 많았나요? 왜 충북이란 지역에서 언론인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오.(웃음)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역언론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전형적인 ‘서울 촌년’이었거든요.(대학도 서울에서 나왔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한국사회의 절반쯤만 알고 살았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데다 양가 조부모님들도 서울에 있어서 수도권을 벗어날 일이 없었어요. 지역언론이라는 채널이 수도권까지 닿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몰랐던 거죠.

원래는 꿈이 언론인이었어요. 저널리즘을 전공하려고 대학원을 충북 제천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지역언론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우물 밖을 보게 됐어요.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차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차별’로 이어지고 있고, 지방의 많은 의제와 이슈들은 서울의 게이트키퍼들에 의해 삭제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없던 일이 될 뻔한 그 사건들을 기록하는 게 지역언론이라는 것도 알았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역언론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짜로 필요한 언론의 역할을 내가 여기서 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그러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2017년도에 청주에 있는 방송국에 기자로 입사를 하게 되면서 아예 이주를 했고요. 3년 조금 넘게 기자 생활을 하고 활동가로 전직을 했어요. (어쩌면 두 개의 형태가 합한 것이 언론 활동가가 아닐까. 하하) 취업 때문에 오긴 했지만 이제는 8년차 충북도민이자 청주시민이 됐네요. 지역은 좋은 기자 한 명, 성실한 활동가 한 명의 존재감이 정말 커요. 자원이 적다 보니.... 자주 오고, 자주 떠나기도 하고요.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높거든요. 우리끼리는 ‘개인기로 버틴다’고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역과 얽힌 온갖 이슈에 결합하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요.(웃음)

당연히 힘들 때가 많아요. 모든 활동가들이 그렇듯이요. 더구나 지방은 청년 1인가구가 살기 좋은 환경도 아니고, 가족과 떨어져 있어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해요. 그래도 청주에서 사랑하는 동료이자 친구들, 존경하는 선배들을 만났어요. ‘일로 만난 사이’에서 시작해, ‘일도 같이 하는 사이’가 됐달까요. 덕분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여러 가지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요. (웃음)


Q. 사실 저희가 안만난지 1년이 지났어요. 저희가 그래도 꽤 지속적으로 네트워킹도 하고, 술한잔도 하면서 관계를 이어왔는데. 최근은 연락이 안될 정도로 바빴던 이유가 오송지하도참사 1주기 기록집이 잖아요. 이 책을 발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최근 충북에서 벌어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지난해 7월 15일에 있었던 오송참사예요.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지하차도 안으로 물이 들어차 14분이 희생되셨고요. 가까스로 빠져나온 16분의 피해자들이 계세요. 중요한 건, 구조된 분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죽을 힘을 다해 자력으로 탈출한 분들만 있을 뿐이고요. 그 분들 마저도 정신적으로... 지금 되게 힘든 상황이시고요.

원인은. 인근 미호강의 임시제방을 허술하게 쌓은 바람에 폭우로 제방이 붕괴됐고, 엄청난 양의 물이 마을로 쏟아지면서 지하차도가 순식간에 잠긴거예요. 제방을 제대로 관리했어야 했고, 애초에 진입을 통제했어야 하고, 신고도 들어갔지만 그 어느 기관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저 고인 물을 빼고 희생자 수색을 했을 뿐이죠.

참사 당일, 그 이후 일들을 살펴보면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과 완전히 같아요. 기어코 유족을 투사로 만드는 것까지도요. 

그래서 이제 몇 명의 활동가들이, 저까지 합해서 6명밖에 안 되는데. 지금 제가 생각해도 놀랍긴 하지만. 기록집을 만들자. “1주기 아니면 언제 기록집을 만들겠느냐. 2주기 때? 3주기 때?” 조금 무리일 수도 있지만 시작을 한거죠. 기록집 제작을 위한 기획부터 인터뷰, 편집까지. 그래서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경험을 묶은 구술 기록집 ‘나 지금 가고 있어’를 발간하게 되었어요. 참사가 일어나고 1년간의 이야기를 듣고요. 



Q. 저는 기록집 발간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 조차도 그 참사가 1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저와 같은 사람들은 오송지하도참사를 비교적 참사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참사 이후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협의회를 만들고 시민대책위도 꾸려져 격렬하게 싸웠는데... 참사의 내용과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지역 밖으로 잘 퍼지지 않았어요. 그 사이 충청북도와 청주시가 유가족에게 거짓말을 하고 시민 합동분향소를 강제로 철거했고요.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이게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면 이렇게 조용했겠느냐고. 언론운동을 하는 활동가로서 말문이 막혔어요. 어머니 말씀이 맞거든요. 

소위 전국권 언론들은 지방의 이슈들을 반영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이 죽고, 거리에 나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철저히 외면해요. 반면 서울에서 벌어진 일들은 사소한 가십거리도 뉴스를 타죠. 전국권 언론이 아니라 서울 언론이에요. 사실상 언론 역할을 하는 포털 사이트도 지역 언론사를 배제합니다. 포털과 유튜브를 통해서 손안으로 뉴스가 배달되는 세상이지만, 그건 절반의 국민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에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지역 뉴스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거나 지역 언론사 채널을 찾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조차 지역 의제와 연결되지 못 하는거죠.

그래서 구술기록집을 만든 것도 있어요. 우리가 새로운 채널을 뚫는 시도를 하는 거죠. 각 지역에 살고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책을 구매하고 있어요. 이렇게 지금처럼 동료 활동가가 참사에 대해 물어봐 주기도 하죠. 정말 반갑고 책 만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어요.

‘여기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고,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참사였다고, 지금도 피해자들이 너무 힘들어한다고, 같이 그들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고요. 

몰라서 그렇지. 알게 되면 분명히 옆에 같이 서 줄 사람들이 더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이런 사회적 참사에서 유가족들이 겪는 애도의 과정 중 꼭 필요한 단계가 가족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에요.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그냥 애초에 국가와 지방정부의 책임으로 일어난, 일어나면 안 될 참사였다는 걸 모두가 인정하는 거죠. 유족들은 그래요. “왜 그날 희생자를 내보냈을까”, “내가 전화통화 할 때 썬루프로 탈출하라”고 이야기 해줬으면 살았을텐데, “차로 출퇴근 시켰으면 안 죽었을텐데”, 이렇게 자꾸 자책하면서 있지도 않은 자신의 잘못을 만들어내며 괴로워해요.


피해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지하차도에 진입하는 거 보고 따라 들어 온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죽었어요”라고, “한 명이라도 손잡고 같이 나왔어야 했는데 못 데리고 나왔다”고,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을 구출하지 못 했다고”. 거기서 스스로 빠져나온 것만으로 기적인데 자기만 살았다는 죄책감과 부채 의식에 시달려요. 너무 가슴이 아프죠. 많은 사람들이 오송참사를 사회적 참사로 기억하고, 유족과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고 우리 사회도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Q.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아요. 기록집을 발간하며 있었던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요. 기록집을 발간하며 어떤 점을 느끼셨었는지. 어떻게 보면 현장에 바로 투입되는 상황이었는데... 

책에도 쓴 내용인데요.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나서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아들 이야기 실컷 하게 해줘서 고맙다고요. 진짜 둘이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사실 저희 기록단이 책을 만드는 내내 중요하게 논의했던 건, ‘기록을 위해 뭉쳤지만, 기록만 하지는 말자’는 거였어요. 유가족, 생존자들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다면 기록 활동과 상관없이 만나서 뭐든 해보자고요. 기록집에 담지 못한 많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어요.



Q.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인터뷰로 남겨보면 어떨까해요. 마음이 힘들 것 같은데. 이야기 해주 실 수 있을까요?

음... 많은데요. 어머니를 잃으신 딸이자 유가족협의회 공동대표님도 인터뷰를 했는데요. 제가 같이 울면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치유가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억울한 상실이라는 걸 공감해주고, 곁에서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 하는 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또 어떤 분들은 그러시더라고요. 자기들 이야기가 이렇게 기록으로 남게 될 줄 몰랐다고. 누가 와서 물어 봐주고 책을 만들어줄 줄 몰랐다고 말이에요. 

기록활동을 시작하면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을 많이 보고, 배웠어요. 고민도 많이 했고요. 저희를 믿고 힘든 이야기를 꺼내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행여 예상치 못한 실수로 실망을 드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기록단끼리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피해자들의 입장을 살피고 대변한다고 나름 노력을 해왔지만, 지금 보니 아는게 너무 없었다고요. 한분 한분 만날 때마다 몰랐던 이야기가 막 나오는데 너무 죄송했어요. 정치적 투쟁을 힘차게 이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피해자들의 마음에 맺힌 상처를 같이 나누는 것이잖아요. 사실 기록집에 관련된 모든 분들의 이야기를 다 담을 수 없었어요. 너무 아쉬운 부분이죠. 아직 못 만난 분들도 많고요. 기록집을 핑계 삼아 더 많은 분들을, 부지런히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7월 20일에 오송참사를 겪은 사람들과 연대자들이 ‘나 지금 가고 있어’ 출간 기념 북토크를 열어요. 기록집 발간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북민언련에서 여러단체들과 오송참사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행사를 연 적이 있어요. 자녀를 잃은 유가족께서 참여해 고립감을 호소하셨고, 오송참사보도를 소홀히 하는 언론에 문제 제기도 하셨어요. 그때 유튜브 생중계로 지켜보던 한 시청자가 유족께 댓글을 남겼어요. 먼 곳 어딘가에 어머님과 함께 오송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꼭 힘을 내시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유족께서도 큰 위안을 얻었어요. 

유가족, 생존자분들은 낯선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에 큰 힘을 받는다고 말해요. 참 신기해요. 생면부지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쏟게 되는 게요. 우리의 외침이 대답 없는 메아리로 소멸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이 드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다들 버티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책 구매신청 명단을 자주 살펴봐요. 그 이름들을 기억하고 싶거든요. 책 발간 소식을 듣고 오송참사를 떠올리고, 귀찮게 주소를 입력하고, 계좌번호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긴 숫자를 찍어 책값을 이체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수고를 했을 사람들을요.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책 발간 소식에 많은 격려를 해주고 이렇게 물어봐주는 가현 님도 너무 고맙습니다.

부디 많이 구매해주시고, 꼭 읽어주시고, 여러분이 다니는 도서관에 비치할 수 있도록 희망도서 신청도 해주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모르는 분들에게 닿는다면 더 큰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알기로는 6명의 기록자들의 안부가 “잠은 좀 잤나요?”라고 들었는데, 많이 짧은 시간 기록집을 만들며 고생한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를 포함해 권미정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 박누리 월간 옥이네 편집국장, 선지현 삶과노동 잇는 배움터 ‘이짓’ 대표, 이수희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조장우 세월호 충북대책위원회 활동가, 이렇게 6명이 기록단을 꾸렸어요. 

놀랍게도 두 달 만에 책을 냈어요.(웃음)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시작했고요. 1주기 맞춰서 무조건 낸다는 생각으로 잘 시간을 쪼개서 만들었죠. 다들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여러모로 힘들지만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됐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각자의 일을 정신없이 하면서 또 동시에 기록집 작업을 진행했으니 충분한 시간을 쏟지 못 해 어설픈 부분도 있고,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도 많아요. 그냥 제 욕심이 그렇다는 거고요. 닮고 싶은 선배들과 팀을 이뤄 소중한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계희수 활동가의 개인적인 목표에 대해 희수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인터뷰를 하며 조금은 웃었고, 조금은 눈물이 나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메아리가 소멸되지 않도록,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라는 위안을 줄 수 있도록 이 사회가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희수 활동가의 메아리를 옆에서 지켜보며 대답해 주리라 다짐했다. “희수, 내가 옆에 함께 있어. 무엇을 하든 너의 곁에서 내가 응원할게. 넌 참 대단해. 그리고 고마워. 늘 존경해.”라는 인사말을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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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 윤가현

소중한 활동가 동료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아마도 내가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활동가 동료와 나를 응원해주는 인터뷰에 담지 못한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임팩트 그라운드'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가 후원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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