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해 주실 수 있나요?
최근에 임금 노동 단위가 사라져서 하나가 빠지네요. 보통은 대구에서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민뎅이라고 소개를 해요.
Q. ‘대구’, ‘퀴어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네요.
사실 지역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활동하고 있진 않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긴 한데, 어쨌든 한국 사회가 너무 서울 중심적이라 비서울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 같기는 해서 ‘대구’를 언급하고는 해요. 그리고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소개를 해요.
Q. ‘활동가’는 어떻게든 ‘움직이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민뎅 님과 어울리는 동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세 가지 꼽아주실 수 있나요?
‘읽다’, ‘쓰다’, ‘말하다’. 이 세 가지요.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쓰기를 계속하고 있고, 날마다 무언가를 읽고 있고, 말하고 있어서요.
Q. 어울리는 명사도 세 가지 꼽아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머리에 ‘안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영화 <안경> 있잖아요. 그것도 떠오르기도 하고, 제가 평소에 안경을 좋아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쓰기도 했고 그래서 인생의 필수품이기도 하거든요. 시력이 엄청 나쁘진 않은데 안경이 없으면 너무 불편해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이 나기도 했어요. 그 뒤에 생각난 것은 ‘관계’, 그리고 ‘돌봄’이에요. 최근 몇 년간 꽂혀 있는 화두이기도 한 것들이에요. 오늘 오면서 ‘동그라미’를 생각하기도 했어요. 나의 동그라미를 잘 지켜나가고 회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Q. 그렇군요. 더 많은 단어들을 꼽아가면서 듣고 싶기도 한데, 활동가로서의 민뎅 님을 알아가고 싶어서 인터뷰를 섭외한 것이기도 해서요. 혹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계기가 어떤 것이었나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준점을 두는 건 2012년 대선이에요. 대학을 들어갔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고 활동 전에 다시 들어가는 일이 있었어요. 인턴을 하려고 하니까 근무조건이 전공 상관 없이 그냥 대학생이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한국에서 대학을 안 나오면 제약이 너무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당시에 하던 아르바이트가 너무 싫었거나 공부를 좀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다시 대학에 들어갔는데 전공이 정치학이었어요. 사실 저는 윤리교육과에 가서 윤리 교사가 되고 싶기도 했거든요. 제가 청소년기에 윤리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그 선생님이 제가 사회학과 가서 사회 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언뜻 하셨어요. 그 이야기가 지금도 한번씩 생각이 날 정도로 인상이 깊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학과가 학과다 보니(정치학과) 시민단체를 알게 되기도 하면서 그 곳에서 임금노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2012년 대선은 박근혜가 당선된 대선이었어요. 제가 수업 때문에 단체에 가거나, 혼자 집회에 가 보기도 했거든요. 그러다가 민주당 당적을 가지지 않았지만 민주당 쪽 대선 운동에 합류를 하게 되어서 그 때가 활동의 시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이듬해에 지금 친하게 지내는 몇몇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평화캠프에서 일하게 되기도 해서 직업으로서는 2013년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당시에 지금의 녹색당이나 노동당 등 진보정당들을 잘 모를 때이기도 했고 민주당 같은 큰 정당에서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진 후에는 약간의 놀림이 되기도 했지만 그 당시의 저는 ‘잘 쓰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되게 열심히 했어요. 동성로에서 가장 싼 고시원 방 구해서 출퇴근하기도 하고요.
Q.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무척 오래된 생각이었군요. 그러면 어린이, 청소년 시절의 민뎅 님은 특별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감수성이 있는 편이었나요?
청소년 시기에 유독 고민과 어려움이 많다거나 학교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특히나 고등학생 때는 학교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는데, 그 안에서의 관계가 아주 중요했어요.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이 별거했고, 고등학생 때는 부모의 이혼을 겪으면서 학교에서 맺었던 관계가 중요했거든요. 초등학생 때나 그 이전에도 그냥 잘 지냈어요. 시골이라 학교든 가정이든 체벌이 너무 당연하게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불합리하다는 감각이 당시에는 잘 없었던 것 같네요.
Q. 그러면 활동을 하게 된 계기라고 굳이 꼽자면 정치학과 진학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어떤 사회 분위기였나요?
제 인생의 첫 집회가 고등학생 때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였어요. 딱 한 번 병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간 기억이 있는데, 그 영향도 있었던 것 같고 사실 잘 모르겠어요. 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졸업 후에 대학을 가거나 재수를 했는데 그 중 저만 유일하게 돈을 벌어야 했어요. 돈이 없어 대학을 가지 못한다거나, 아까 말했듯이 부모가 사이가 좋지 않고 가족 관계가 행복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몸에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는 다른 환경에 내가 있다는 것을 계속 목격해 온 것이죠.
Q. 그런 경험들이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네요. 혹시 ‘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이하 나페)’ 활동은 요즘 좀 어떤가요?
나페는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에요. 내부 구성원들의 변화가 있기도 하고, 제가 적극적으로 활동가를 모집하거나 할 만큼의 여력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비정기적으로 무언가를 해 나갈 것 같아요.
Q. ‘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가 강남역 사건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 활동과 대구퀴어문화축제 활동이 민뎅의 퀴어페미니즘 활동의 주축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두 가지를 소개해 줄 수 있나요?
나페는 강남역 이후 몇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죠. 대구에서 조금 더 액션이나 행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팀이었고 그 활동이 가능했던 건, 제가 2015년부터 페미니즘 책모임을 하고 있었어요. 여성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가 무언가 불편해지고, 그 당시 파트너였던 사람도 제가 여성주의를 공부하면 좋겠다고 권유를 하고 이러면서 독학처럼 하게 된 건데 그 방식이 책모임이었던 거죠. 같이 책 읽고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거나,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토대가 되어서 활동으로 이어진 거예요. 아직도 그 모임을 하고 있어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퀴어에 대한 공부나 퀴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만나지기도 했어요. 저 스스로에 대한 정체화도 그러면서 다시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나페를 퀴어페미니즘을 고민하는 그룹으로 정체화하게 되었던 거죠.
대구퀴어문화축제 활동의 경우에는 이전에 정당 활동 때문에 한번 하고서 계속하지는 않다가 3년 전에 다시 들어가서 지금이 3년째예요. 다시 시작할 때는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대표적인 축제에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걸 생각했던 게 컸어요. 그래서 이전에 대선 운동 때처럼 ‘잘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또 하면서 신중하게 기획단에 신청을 했죠. 계속하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을 했어요. 올해는 공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내년에는 저의 현실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올해는 일단 그 일을 잘 나눠가면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2012~2013년 쯤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으니 이제 10년이 넘었네요. 활동 초반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사회가 좀 어떻게 변화했다고 느끼시나요?
사실 사회는 좀 더 무서워진 것 같아요. 상상의 범주에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도 하고요. N번방도 그랬고, 강남역도 사실은 그랬어요. 기술 면으로 보아도 과거랑 무척 다른 사회이기도 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도 해서요. 어떤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세월호도 그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후 세대에게는 이태원 참사가 그러할 것 같아요. 자본이 여성의 몸을 자원화, 노예화하는 것들이 어떤 참사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별개의 어떤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엄청 밝은 미래, 좋은 결과에 대해서만 생각하면서 활동을 한다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져요.
Q.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활동을 한다는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네, 그걸 놓지는 않죠. 그러니까 저는 굉장히 중요한 건 낙관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한정현 작가가 소설에서 낙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정말 좋기만 할거야라는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근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라는 책 제목을 보면서도 많이 생각했는데, 파국은 어차피 올 거지만 어떻게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그렇군요. 그러면 최근의 활동에 대한 고민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깊고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다면 지금은 누군가와 느슨한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최근에 읽었던 <커먼즈란 무엇인가>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책이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가치나 신념, 친밀감 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폐쇄적 공동체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그것에 상관없이 확대되는 것을 일종의 ‘커먼즈’로 이야기하는데 저는 지금으로선 아주 조건 없는 환대나 공동체라는 것이 어떤 기반 없이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라서요.
그 책이 오랫동안 해 온 책모임들을 새롭게 의미화하고 인식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제가 바쁘고 다른 우선순위들이 있음에도 책모임이나, 바느질 모임 같은 것들을 놓지 못하고 했거든요. 이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나는 왜 하고 있지? 라는 고민을 10년 전부터 했는데 정리가 좀 된 것 같아요.
Q. 느슨한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늘 고민이 되는 것 같아요. 앞서 이야기를 잠시 하긴 했지만,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민뎅 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 주실 부분이 있을까요?
저의 경우에는 퀴어 이론이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포괄적으로 보아야 하는 관점이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집중적으로 현장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어떤 관점이나 이야기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지역에서 퀴어페미니즘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예전에 개인적으로 지역에 언니네트워크 같은 단체가 없다는 것을 많이 아쉬워 했어요. 지금도 대구에는 그런 단체가 없죠. 지금 저도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여력은 없는 상황이지만, 어떤 공간을 만들고 포괄적 인식을 넓히고 키우는 것들이 지역에서 퀴어페미니즘이 갖는 중요한 의미라는 생각을 해요. 사실 그래서 되게 오래전부터 여성 운동보다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고 싶었어요. 물론 너무 필요하고 절박하고 시급한 것이긴 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정당 운동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여성운동 단체에서 의제를 다룰 때 배제되는 퀴어나 장애에 대해 생각하기도 해요.
Q. 정형화된 생애 주기에서 어긋나는 사람들이 배제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군요. 비서울 지역에서 퀴어페미니즘의 역할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조금 더 이해가 돼요. 이제 인터뷰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데,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페를 만들고 처음으로 그 이름으로 집회를 했을 때가 생각나요. 온전히 내가 기획하고 주도한 첫 집회라서 그런 것 같아요. 2014년 세월호 참사 후에 대구에 서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 당시에 소수의 사람들이 행진을 시작했는데, 행진을 할수록 불특정한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점점 늘어나고, 마무리 발언을 할 때는 200명 이상이 함께 해주었어요. 올해 10주기를 맞이하면서 그때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경험들이 여성주의 운동을 하고 싶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요.
Q. 10년 후에 민뎅 님은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계획이나, 막연한 기대가 있나요?
저는 서른 살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딱히 돌아가고 싶은 건 인생에 없었고 늘 지금이 좋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서른이 되면 이 사람들이랑 얼마나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성장해 있을까 이런 것들이 기대의 포인트였어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는 공감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마흔 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런 감각이 사실은 아니에요.
하고 싶었던 운동을 하면서 이것이 임금노동의 형태가 되기도 했지만 그건 사회의 선두에 서는 일도 아니고 가난한 일이기도 한 거죠. 에니어그램 상으로 제 본질은 불안감인데 그런 것이 있는 상태에서 계속 저임금 노동을 할 것이고, 물론 운동을 계속 하고 싶지만 사회에서 권장되는 삶의 형태가 아닌 상태를 살아가면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잖아요. 남성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마흔 이후 다양하고 안정적인 모델의 언니들을 많이 못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이런 고민이 무척 많아져서 그런 불확실성이나 불안이 사라지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걸 끌어안고 잘 살아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만두거나 놓치지 않고 지금 관계맺기 하고 있는 친구들과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 아픈 몸은 그대로겠지만 동성혼 법제화, 생활동반자법은 꼭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Q. 마지막 질문인데요, 민뎅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제가 최근에 책에서 ‘결심했으므로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보았어요. 사실 저는 결심하기까지 수없이 망설이고 결심하고도 망설여서 생각보다 많은 긴장과 떨림으로 어떤 것들을 하고 있거든요. 그랬을 때 중요한 포인트는 ‘하고 있다’는 것 같긴 한데 내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구나 싶었어요.
같은 책에 ‘지루할 만큼의 안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누구에게나 결심 없이도 지루할 만큼의 안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불안한 것들이 실현되지 않고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저 ‘안전’이라는 표현을 정말 많이 쓰는 것 같네요. 앞서서 꼽았어야 할 명사는 ‘안전’인 것 같아요.
* 민뎅 활동가가 추천하는 퀴어페미니즘 도서
- <젠더를 바꾼다는 것>, 먼로 버그도프, 북하우스
-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앨리슨 케이퍼, 오월의봄
- <일기>, 황정은, 창비
#대구 #퀴어축제 #젠더 #페미니즘
인터뷰어 : 나루
사랑의 방식에 대해 항상 고민하는 인간동물입니다. 대구동물권행동 비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Q.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해 주실 수 있나요?
최근에 임금 노동 단위가 사라져서 하나가 빠지네요. 보통은 대구에서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민뎅이라고 소개를 해요.
Q. ‘대구’, ‘퀴어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네요.
사실 지역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활동하고 있진 않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긴 한데, 어쨌든 한국 사회가 너무 서울 중심적이라 비서울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 같기는 해서 ‘대구’를 언급하고는 해요. 그리고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소개를 해요.
Q. ‘활동가’는 어떻게든 ‘움직이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민뎅 님과 어울리는 동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세 가지 꼽아주실 수 있나요?
‘읽다’, ‘쓰다’, ‘말하다’. 이 세 가지요.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쓰기를 계속하고 있고, 날마다 무언가를 읽고 있고, 말하고 있어서요.
Q. 어울리는 명사도 세 가지 꼽아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머리에 ‘안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영화 <안경> 있잖아요. 그것도 떠오르기도 하고, 제가 평소에 안경을 좋아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쓰기도 했고 그래서 인생의 필수품이기도 하거든요. 시력이 엄청 나쁘진 않은데 안경이 없으면 너무 불편해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이 나기도 했어요. 그 뒤에 생각난 것은 ‘관계’, 그리고 ‘돌봄’이에요. 최근 몇 년간 꽂혀 있는 화두이기도 한 것들이에요. 오늘 오면서 ‘동그라미’를 생각하기도 했어요. 나의 동그라미를 잘 지켜나가고 회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Q. 그렇군요. 더 많은 단어들을 꼽아가면서 듣고 싶기도 한데, 활동가로서의 민뎅 님을 알아가고 싶어서 인터뷰를 섭외한 것이기도 해서요. 혹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계기가 어떤 것이었나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준점을 두는 건 2012년 대선이에요. 대학을 들어갔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고 활동 전에 다시 들어가는 일이 있었어요. 인턴을 하려고 하니까 근무조건이 전공 상관 없이 그냥 대학생이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한국에서 대학을 안 나오면 제약이 너무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당시에 하던 아르바이트가 너무 싫었거나 공부를 좀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다시 대학에 들어갔는데 전공이 정치학이었어요. 사실 저는 윤리교육과에 가서 윤리 교사가 되고 싶기도 했거든요. 제가 청소년기에 윤리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그 선생님이 제가 사회학과 가서 사회 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언뜻 하셨어요. 그 이야기가 지금도 한번씩 생각이 날 정도로 인상이 깊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학과가 학과다 보니(정치학과) 시민단체를 알게 되기도 하면서 그 곳에서 임금노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2012년 대선은 박근혜가 당선된 대선이었어요. 제가 수업 때문에 단체에 가거나, 혼자 집회에 가 보기도 했거든요. 그러다가 민주당 당적을 가지지 않았지만 민주당 쪽 대선 운동에 합류를 하게 되어서 그 때가 활동의 시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이듬해에 지금 친하게 지내는 몇몇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평화캠프에서 일하게 되기도 해서 직업으로서는 2013년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당시에 지금의 녹색당이나 노동당 등 진보정당들을 잘 모를 때이기도 했고 민주당 같은 큰 정당에서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진 후에는 약간의 놀림이 되기도 했지만 그 당시의 저는 ‘잘 쓰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되게 열심히 했어요. 동성로에서 가장 싼 고시원 방 구해서 출퇴근하기도 하고요.
Q.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무척 오래된 생각이었군요. 그러면 어린이, 청소년 시절의 민뎅 님은 특별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감수성이 있는 편이었나요?
청소년 시기에 유독 고민과 어려움이 많다거나 학교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특히나 고등학생 때는 학교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는데, 그 안에서의 관계가 아주 중요했어요.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이 별거했고, 고등학생 때는 부모의 이혼을 겪으면서 학교에서 맺었던 관계가 중요했거든요. 초등학생 때나 그 이전에도 그냥 잘 지냈어요. 시골이라 학교든 가정이든 체벌이 너무 당연하게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불합리하다는 감각이 당시에는 잘 없었던 것 같네요.
Q. 그러면 활동을 하게 된 계기라고 굳이 꼽자면 정치학과 진학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어떤 사회 분위기였나요?
제 인생의 첫 집회가 고등학생 때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였어요. 딱 한 번 병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간 기억이 있는데, 그 영향도 있었던 것 같고 사실 잘 모르겠어요. 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졸업 후에 대학을 가거나 재수를 했는데 그 중 저만 유일하게 돈을 벌어야 했어요. 돈이 없어 대학을 가지 못한다거나, 아까 말했듯이 부모가 사이가 좋지 않고 가족 관계가 행복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몸에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는 다른 환경에 내가 있다는 것을 계속 목격해 온 것이죠.
Q. 그런 경험들이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네요. 혹시 ‘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이하 나페)’ 활동은 요즘 좀 어떤가요?
나페는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에요. 내부 구성원들의 변화가 있기도 하고, 제가 적극적으로 활동가를 모집하거나 할 만큼의 여력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비정기적으로 무언가를 해 나갈 것 같아요.
Q. ‘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가 강남역 사건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 활동과 대구퀴어문화축제 활동이 민뎅의 퀴어페미니즘 활동의 주축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두 가지를 소개해 줄 수 있나요?
나페는 강남역 이후 몇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죠. 대구에서 조금 더 액션이나 행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팀이었고 그 활동이 가능했던 건, 제가 2015년부터 페미니즘 책모임을 하고 있었어요. 여성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가 무언가 불편해지고, 그 당시 파트너였던 사람도 제가 여성주의를 공부하면 좋겠다고 권유를 하고 이러면서 독학처럼 하게 된 건데 그 방식이 책모임이었던 거죠. 같이 책 읽고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거나,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토대가 되어서 활동으로 이어진 거예요. 아직도 그 모임을 하고 있어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퀴어에 대한 공부나 퀴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만나지기도 했어요. 저 스스로에 대한 정체화도 그러면서 다시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나페를 퀴어페미니즘을 고민하는 그룹으로 정체화하게 되었던 거죠.
대구퀴어문화축제 활동의 경우에는 이전에 정당 활동 때문에 한번 하고서 계속하지는 않다가 3년 전에 다시 들어가서 지금이 3년째예요. 다시 시작할 때는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대표적인 축제에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걸 생각했던 게 컸어요. 그래서 이전에 대선 운동 때처럼 ‘잘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또 하면서 신중하게 기획단에 신청을 했죠. 계속하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을 했어요. 올해는 공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내년에는 저의 현실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올해는 일단 그 일을 잘 나눠가면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2012~2013년 쯤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으니 이제 10년이 넘었네요. 활동 초반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사회가 좀 어떻게 변화했다고 느끼시나요?
사실 사회는 좀 더 무서워진 것 같아요. 상상의 범주에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도 하고요. N번방도 그랬고, 강남역도 사실은 그랬어요. 기술 면으로 보아도 과거랑 무척 다른 사회이기도 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도 해서요. 어떤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세월호도 그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후 세대에게는 이태원 참사가 그러할 것 같아요. 자본이 여성의 몸을 자원화, 노예화하는 것들이 어떤 참사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별개의 어떤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엄청 밝은 미래, 좋은 결과에 대해서만 생각하면서 활동을 한다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져요.
Q.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활동을 한다는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네, 그걸 놓지는 않죠. 그러니까 저는 굉장히 중요한 건 낙관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한정현 작가가 소설에서 낙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정말 좋기만 할거야라는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근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라는 책 제목을 보면서도 많이 생각했는데, 파국은 어차피 올 거지만 어떻게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그렇군요. 그러면 최근의 활동에 대한 고민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깊고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다면 지금은 누군가와 느슨한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최근에 읽었던 <커먼즈란 무엇인가>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책이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가치나 신념, 친밀감 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폐쇄적 공동체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그것에 상관없이 확대되는 것을 일종의 ‘커먼즈’로 이야기하는데 저는 지금으로선 아주 조건 없는 환대나 공동체라는 것이 어떤 기반 없이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라서요.
그 책이 오랫동안 해 온 책모임들을 새롭게 의미화하고 인식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제가 바쁘고 다른 우선순위들이 있음에도 책모임이나, 바느질 모임 같은 것들을 놓지 못하고 했거든요. 이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나는 왜 하고 있지? 라는 고민을 10년 전부터 했는데 정리가 좀 된 것 같아요.
Q. 느슨한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늘 고민이 되는 것 같아요. 앞서 이야기를 잠시 하긴 했지만, 퀴어페미니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민뎅 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 주실 부분이 있을까요?
저의 경우에는 퀴어 이론이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포괄적으로 보아야 하는 관점이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집중적으로 현장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어떤 관점이나 이야기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지역에서 퀴어페미니즘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예전에 개인적으로 지역에 언니네트워크 같은 단체가 없다는 것을 많이 아쉬워 했어요. 지금도 대구에는 그런 단체가 없죠. 지금 저도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여력은 없는 상황이지만, 어떤 공간을 만들고 포괄적 인식을 넓히고 키우는 것들이 지역에서 퀴어페미니즘이 갖는 중요한 의미라는 생각을 해요. 사실 그래서 되게 오래전부터 여성 운동보다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고 싶었어요. 물론 너무 필요하고 절박하고 시급한 것이긴 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정당 운동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여성운동 단체에서 의제를 다룰 때 배제되는 퀴어나 장애에 대해 생각하기도 해요.
Q. 정형화된 생애 주기에서 어긋나는 사람들이 배제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군요. 비서울 지역에서 퀴어페미니즘의 역할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조금 더 이해가 돼요. 이제 인터뷰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데,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페를 만들고 처음으로 그 이름으로 집회를 했을 때가 생각나요. 온전히 내가 기획하고 주도한 첫 집회라서 그런 것 같아요. 2014년 세월호 참사 후에 대구에 서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 당시에 소수의 사람들이 행진을 시작했는데, 행진을 할수록 불특정한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점점 늘어나고, 마무리 발언을 할 때는 200명 이상이 함께 해주었어요. 올해 10주기를 맞이하면서 그때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경험들이 여성주의 운동을 하고 싶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요.
Q. 10년 후에 민뎅 님은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계획이나, 막연한 기대가 있나요?
저는 서른 살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딱히 돌아가고 싶은 건 인생에 없었고 늘 지금이 좋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서른이 되면 이 사람들이랑 얼마나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성장해 있을까 이런 것들이 기대의 포인트였어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는 공감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마흔 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런 감각이 사실은 아니에요.
하고 싶었던 운동을 하면서 이것이 임금노동의 형태가 되기도 했지만 그건 사회의 선두에 서는 일도 아니고 가난한 일이기도 한 거죠. 에니어그램 상으로 제 본질은 불안감인데 그런 것이 있는 상태에서 계속 저임금 노동을 할 것이고, 물론 운동을 계속 하고 싶지만 사회에서 권장되는 삶의 형태가 아닌 상태를 살아가면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잖아요. 남성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마흔 이후 다양하고 안정적인 모델의 언니들을 많이 못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이런 고민이 무척 많아져서 그런 불확실성이나 불안이 사라지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걸 끌어안고 잘 살아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만두거나 놓치지 않고 지금 관계맺기 하고 있는 친구들과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 아픈 몸은 그대로겠지만 동성혼 법제화, 생활동반자법은 꼭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Q. 마지막 질문인데요, 민뎅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제가 최근에 책에서 ‘결심했으므로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보았어요. 사실 저는 결심하기까지 수없이 망설이고 결심하고도 망설여서 생각보다 많은 긴장과 떨림으로 어떤 것들을 하고 있거든요. 그랬을 때 중요한 포인트는 ‘하고 있다’는 것 같긴 한데 내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구나 싶었어요.
같은 책에 ‘지루할 만큼의 안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누구에게나 결심 없이도 지루할 만큼의 안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불안한 것들이 실현되지 않고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저 ‘안전’이라는 표현을 정말 많이 쓰는 것 같네요. 앞서서 꼽았어야 할 명사는 ‘안전’인 것 같아요.
* 민뎅 활동가가 추천하는 퀴어페미니즘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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